[뉴스펭귄 이강운 대기자] 작은 돌 틈 밑에서 극한의 겨울을 버티던 ‘이른봄애호랑나비’가 번데기를 찢고 날개를 달고 나왔다. 호랑나비보다 좀 작은 크기 때문에 애호랑나비로 불렸는데 요즘은 작다는 뜻의 애(矮)가 아니라 ‘애를 태워야’ 겨우 볼 수 있는 희귀한 나비가 되었다. 몇 년간 보이질 않아 필자를 애태우게 하던 놈이 며칠 전 건강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①이른봄애호랑나비 번데기 (사진 이강운 대기자)/뉴스펭귄
①이른봄애호랑나비 번데기 (사진 이강운 대기자)/뉴스펭귄

‘이른봄애호랑나비(Luehdorfia puziloi)’라는 이름은 이 나비의 출현 시기, 형태적 특성을 반영해 만든 복합적 국명이다. 노란색과 검은색이 어울려 호랑이의 얼룩 줄무늬 같은 날개 무늬와 이른 봄을 알리는 단어가 합쳐져 ‘이른봄애호랑나비’라 부르고 있다. 올해는 이른 봄이 아닌 진달래 꽃 질 때쯤 아주 늦게 출현했다. 일본은 같은 속의 애호랑나비(Luehdorfia japonica)를 멸종위기종으로 지정 보호하고 있는데 이렇게 몇몇 놈이 띄엄띄엄 나타나니 아마도 한반도에서도 곧 멸종위기종으로 지정해야 되지 않을까 싶다.

②진달래 꽃 흡밀하는 이른봄애호랑나비 (사진 이강운 대기자)/뉴스펭귄
②진달래 꽃 흡밀하는 이른봄애호랑나비 (사진 이강운 대기자)/뉴스펭귄

애호랑나비가 나타나면 쥐방울덩굴科의 족두리풀이 때를 맞춰 우글쭈글 주름 잡힌 하트 모양의 잎을 삐쭉 내민다. 아침, 저녁 아직 추위가 느껴지는 이 계절에 웅크리고 앉아 슬그머니 자주색 족두리 모양의 꽃을 피웠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족두리풀은 자세히 보아야 볼 수 있다. 언 땅을 뚫고 잎이 나올 때부터 땅바닥에 얼굴을 바짝 붙인 자주색 꽃은 하루 종일 제 잎 그늘에 가려 나비나 벌을 만나지 못하는데 어떻게 수정을 할까?

③족두리풀 (사진 이강운 대기자)/뉴스펭귄
③족두리풀 (사진 이강운 대기자)/뉴스펭귄

꼭꼭 숨어 보이지 않는 신비스런 꽃이지만 수천, 수만 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변해야 번식할 수 있는지 족두리풀은 알고 있었다. 화려한 색깔이나 꽃 모양이 아닌 후각으로 번식할 셈이었다. 칙칙해 보이는 자주색 족두리 모양의 꽃이지만 다른 꽃에서는 결코 만들 수 없는 불쾌한음식 썩는 냄새가 진동을 한다. 부패한 음식 냄새를 향기처럼 느끼는 파리 떼를 꽃으로 유인하여 꽃가루를 옮기는 최적의 번식 방법을 쓰고 있다.

부패한 음식 냄새로 유인된 파리는 족두리풀을 수정시켜주는 고마운 존재들이지만 하루 종일 잎을 갉아먹는 거의 대부분 애벌레는 천적 중의 천적이다. 연약한 잎으로는 그 놈들을 막아낼 재주가 없으므로 애벌레들로부터 자신을 지켜내는 독을 만든다. 족두리풀의 줄기나 잎을 씹으면 입안이 얼얼하고 쏘는 맛이 나는데 바로 아리스토로킥산(Aristolochic acid)이라는 독성 화합물 때문이다.

모든 애벌레가 피하는 아리스토로킥 산이지만 이른봄애호랑나비 애벌레는 꼭 먹어야 할 보약이다. 족두리풀에 있는 맹독성 잎을 먹고 잘 저장해서 다시 강력한 샛노란 냄새 뿔로 바꾸어 자신을 지키는 방어 무기로 사용하는 스페셜리스트로 멋진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족두리풀에 낳은 이른봄애호랑나비의 진주 같은 알 (사진 이강운 대기자)/뉴스펭귄
족두리풀에 낳은 이른봄애호랑나비의 진주 같은 알 (사진 이강운 대기자)/뉴스펭귄
이른봄애호랑나비 애벌레의 샛노란 냄새 뿔 (사진 이강운 대기자)/뉴스펭귄
이른봄애호랑나비 애벌레의 샛노란 냄새 뿔 (사진 이강운 대기자)/뉴스펭귄

쥐방울덩굴科에는 등나무도 아니고 칡도 아닌 등칡과 지독하기 짝이 없는 냄새 때문에 까마귀오줌통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쥐방울덩굴이 있다. 3종 식물 모두 곤충들이 피하려고 하는 치명적인 물질인 아리스토로킥산을 함유하고 있지만 오히려 주식으로 삼는 애벌레들이 있다. 호랑나비속 꼬리명주나비, 사향제비나비와 이른봄애호랑나비는 쥐방울덩굴科 식물과 특별한 공진화를 하고 있다.

등칡 (사진 이강운 대기자)/뉴스펭귄
등칡 (사진 이강운 대기자)/뉴스펭귄
쥐방울덩굴 (사진 이강운 대기자)/뉴스펭귄
쥐방울덩굴 (사진 이강운 대기자)/뉴스펭귄

꼬리명주나비, 애호랑나비, 사향제비나비는 예쁜 나비이긴 하지만 사실 독극물로 무장한 독한 놈들이다. 쥐방울덩굴科의 독성 화합물로 자신을 방어하는 3종의 애벌레들은 기생을 당하거나 잡혀 먹히는 경우가 거의 없다. 애벌레 시절에 먹었던 독성을 잘 간직해 천적한테 잡아먹히지 않을 자신이 있는지, 나비가 되어서도 바람 타고 천천히 비행하는 여유를 보여준다.

쥐방울덩굴 먹는 꼬리명주나비 애벌레 (사진 이강운 대기자)/뉴스펭귄
쥐방울덩굴 먹는 꼬리명주나비 애벌레 (사진 이강운 대기자)/뉴스펭귄
등칡 먹는 사향제비나비 애벌레 (사진 이강운 대기자)/뉴스펭귄
등칡 먹는 사향제비나비 애벌레 (사진 이강운 대기자)/뉴스펭귄

다 끝난 줄 알았던 4월 마지막 봄의 문턱에서 우리는 또다시 산불 현장을 마주한다. 전국각지에서 이어지는 대형 산불은 단지 수목과 가옥만을 삼키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러나 생태계의 토대를 이루는 수많은 생물들의 비명이 담겨 있다. 나뭇잎은 뿌리째 메말라 떨어지고, 바람은 살을 에는 칼이 되어 땅 속, 낙엽 아래, 죽은 나무 틈, 풀잎 뒤에 서 살고 있던 생물들을 단숨에 멸종시킨다.

생존 자체가 거의 불가능한 속도로 타들어가는 산림에서, 애벌레, 번데기, 알, 어른벌레까지 생활사의 전체 단계를 동시에 잃어버리는 곤충은 한 번의 산불로 단일 개체군이 완전히 사라질 수도 있다. 봄이 되면 월동에서 깨어난 곤충들이 알을 낳고 알에서 부화한 애벌레는 열심히 식물을 먹고 번데기를 만들고 다시 어른으로 태어나는 생애의 전부를 쏟는 계절이다. 봄철 산불은 짧은 생활사 전체를 단절시켜 곤충을 멸종시키는 재앙이다.

쥐방울덩굴, 등칡과 족두리풀이 산불에 휩싸여 스러지고 꼬리명주나비, 애호랑나비, 사향제비나비도 줄초상! 산불 피해가 단순한 "숲의 손실"이 아니라, 생물다양성의 붕괴로 직결되고 있는 이 순간에도 우리는 생물의 존재를 잊은 채 산불에만 반응하고 있다.

연구소에 방문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멸종위기종에 관한 질문을 받는다. 흔하던 새소리도 들리지 않고 나비도 딱정벌레도 더 줄어드는 것은 느끼겠는데 정말 멸종된 곤충이 있는지?

벌써 20여 년. 소똥구리나 상제나비 같은 멸종위기종에 관한 제보를 받으면 어디든 달려갔다. 물론 문헌 정보에 의한 정기적 모니터링을 포함해 수 십 차례 현장 조사를 벌였지만 발견하지 못한 종이 많다. 소똥구리가 사라졌고 왕소똥구리도 찾지 못했다. 비무장지대의 다락터 사격장까지 가서도 상제나비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멸종 된 소똥구리 (사진 이강운 대기자)/뉴스펭귄
멸종 된 소똥구리 (사진 이강운 대기자)/뉴스펭귄
멸종 된 상제나비 (사진 이강운 대기자)/뉴스펭귄
멸종 된 상제나비 (사진 이강운 대기자)/뉴스펭귄

멸종위기종이라고 지정된 생물 말고 얼마나 많은 생물들이 죽어나가고 있을까? ‘설마’ 멸종됐을까 했는데 ‘현실’이 되고 있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생태적 재앙으로 상상도 할 수 없는 강도 높은 위험에 빠져 멸종되는 생물들에게 미안하고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강운 대기자 (홀로세생태보존연구소 소장)

서울대 농학박사. 1997년 국내 최초로 홀로세생태학교를 개교해 환경교육을 펼치고 있다. 2005년부터는 서식지외보전기관인 (사)홀로세생태보존연구소를 통해 붉은점모시나비, 소똥구리, 물장군 등 멸종위기종 복원과 멸종위기종의 산업적 활용에 관한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서식지외보전기관협회 회장이며 곤충방송국 유튜브 채널 Hib(힙)의 크리에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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