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펭귄 남주원 기자] "나이 들면서 인상 순해졌다는 소리 참 많이 들어요"
만약 벌매가 사람이라면 주변에서 이런 얘기 꽤나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유조(어린 새)일 때는 '포스 철철' 늠름한 맹금류다운 외모를 자랑하다 성조(어른 새)가 되면 순둥순둥해지는 이 새.
환경부 멸종위기 야생생물 II급이자 천연기념물이기도 한 벌매는 자라면서 외모가 되려 순하게 변한다. 왠지 착해 보이는 생김새만큼이나 맹금류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약한 편.
그럼에도 '벌매'라는 이름을 갖게 된 이유가 있으니, 벌들에게는 세상 둘도 없는 공포의 대상이다. 벌매는 주로 말벌집을 털어 유충을 잡아먹는다. 먹고 남은 벌집은 통째로 뜯어가기도 한다.
제 아무리 맹금류라고 한들 그 무섭기로 소문난 말벌이 주식이라니? 빈틈없이 빽빽하게 난 벌매 깃털 앞에 말벌 독침은 무색해질 뿐이다. 쏘이더라도 독 면역력이 강해 딱히 피해가 없다. 게다가 날카로운 발톱은 벌집을 움켜잡는 데 더없이 훌륭한 도구다.
이처럼 벌매는 타고난 신체적 강점을 활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비상한 두뇌까지 자랑한다. 개구리 등 제 새끼들에게 줄 먹이 일부를 남겨놔 냄새로 말벌을 유인함으로써 집으로 돌아가는 말벌을 쫓아가 벌집을 사냥한다.
물론 말벌뿐만 아니라 꿀벌도 먹는다. 꿀벌집에서는 꿀까지 뺏어 먹는다.
국립생물자원관 국가철새연구센터 제공, 뉴스펭귄이 편집한 영상입니다
벌매는 매해 봄과 가을에 월동지에서 번식지로, 번식지에서 월동지로 한반도 전역을 통과하는 '나그네 새'다. 아주 드물게 국내에서도 번식하는 개체가 발견되나 극소수다.
평소에는 혼자 살아가지만 이동 시기에는 무리를 지어 비행한다. 주로 서해안과 남해안 섬 지역에서 벌매들을 관찰할 수 있다.
특히 올가을 인천 옹진군 소청도에서는 국내 맹금류 관측 사상 벌매 집단 이동이 최대 규모로 기록됐다. 소청도에는 국립생물자원관 국가철새연구센터가 있다.
국립생물자원관 국가철새연구센터 제공, 뉴스펭귄이 편집한 영상입니다
국가철새연구센터에 따르면 2019년과 지난해에는 벌매가 각각 1466마리, 951마리 관측됐으며 올해는 8000여 마리가 포착됐다. 지난해보다 무려 9배 이상 많은 수가 관찰된 것이다.
국가철새연구센터 최유성 박사는 "벌매 성조보다 어린 개체가 많이 지나간 것으로 보아 올해 번식 성공률이 높다고 판단된다"라며 "백령도, 소청도, 대청도가 벌매들이 중국으로 넘어가는 최단 거리라는 점에서 지형적으로 적합하지 않을까"라고 뉴스펭귄에 말했다.
그는 "다른 지역 기후 상황과도 연관이 있을 수 있다. 만약 중국 기후 상황이 좋지 않으면 우리나라를 통해 더 많이 이동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다만 이 같은 내용은 추정일 뿐이며 정확한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아 장기적인 연구가 필요한 상황이다. 국가철새연구센터는 2019년부터 벌매를 조사해왔다. 센터는 매년 벌매 관찰 현황 자료를 바탕으로 기후 및 개체군 변화를 장기적으로 지켜볼 계획이다.
최 박사에 따르면 봄보다는 가을철에 벌매를 비롯한 많은 맹금류가 관찰된다. 봄과 가을 이동경로가 다른데, 소청도는 그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그는 "어려운 작업이긴 하지만 추후 중간기착지에서 벌매를 포획해 이동경로를 관찰할 예정"이라며 "만주지역에서 번식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일부 개체를 포획해 유전자 검사 또는 위치추적기를 부착해 이동경로를 추적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맹금류는 국내에 50여 종이 살고 있지만 벌매를 포함해 21종이 멸종위기종으로 지정돼 있다. 특히 벌매는 높은 나무 꼭대기에 둥지를 틀기 때문에 개발에 따른 산림 훼손은 벌매 번식에 치명적일 수 있다. 농약이나 살충제 사용으로 인해 부족해진 먹이 상황도 이들 생존을 위협한다.
국립생물자원관 국가철새연구센터 제공, 뉴스펭귄이 편집한 영상입니다
공식적으로 발표된 바는 없으나 기후위기 역시 벌매에게 끼칠 영향은 불 보듯 뻔하다. 최 박사는 "벌매가 주로 벌을 먹고 벌은 기후변화에 민감하니, 기후위기가 가속화되면 벌매 또한 큰 타격을 입게 되지 않을까"라며 "벌매는 바람 영향을 많이 받는데 기후변화나 이상기후가 심해지면 이동에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고 예측했다.
그는 "멸종위기종을 포함해 지구상에 살아가는 모든 생물 하나하나가 가치 있다. 보호활동이라는 것이 꼭 어떤 대단한 일이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다"면서 "평상시 주변 생물을 비롯해 기후위기나 자원고갈 등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지면 자연스레 멸종위기종도 지켜나갈 수 있지 않을까"라며 말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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