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펭귄 배진주 기자] 세상 어딘가 거인이 산다. 아홉 명의 거인은 감미로운 목소리로 별을 센다. 그들은 무언가를 해치지 않는다. 자연과 교감하며 천천히 몸에 새길 뿐이다. 유려한 삶을 사는 그들에게 한 ‘인간’이 찾아오고 결국 파국을 맞이한다.
그림책 <마지막 거인>은 주인공의 탐험을 다룬다. 주인공 아치볼드 레오폴드 루스모어는 연구자로 ‘거인족’의 존재를 찾아 떠난다. 험난한 모험 끝, 마침내 아홉 명의 거인을 맞닥뜨리고 열 달 남짓한 시간을 이들과 함께 보낸다. 루스모어는 거인에 관한 이야기를 담아 세상에 내놓는데... 이를 본 사람들은 ‘희귀한’, ‘돈이 되는’ 거인을 찾아가 전부 죽인다.
루스모어는 몰살된 거인을 보고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아간다. 소중한 존재를 잃고 나서야 침묵을 선택한다. 책을 통틀어 대사라곤 딱 한 줄뿐. 루스모어에게 거인 안탈라의 안타까운 목소리가 닿는다. “침묵을 지킬 수는 없었니?”
거인을 찾아간 탐험가
루스모어는 연구가이자 탐험가다. 그의 서재를 통해 지나온 삶을 유추할 수 있다. 갖가지 생물의 표본, 거북이 등딱지, 들소의 뿔, 그리고 총을 쥐고 자랑스러워하는 모습. 연구에 몰두하는 그의 모습 뒤로 여러 종류의 죽음이 스친다.
거인을 찾아가는 여정에도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루스모어는 재미 삼아 구매한 물건이 진짜 ‘거인의 이’라는 걸 알고 모험을 떠난다. 그는 끝내 거인을 만나지만, 함께 했던 일꾼들은 강물에 휩쓸려, 무자비한 종족의 공격으로 전원 사망한다.
루스모어 앞에 나타난 거인들은 강한 인상을 남긴다. 알 수 없는 문양으로 빼곡한 문신, 그 사이로 단단해 보이는 피부, 한 번 휘두르면 무엇이든 부술 듯한 큰 곤봉... 무엇보다도 웅장한 아우라가 일품이다. 루스모어에 비하면 10배 이상은 커 보인다.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쟁취할 수 있을 듯한 힘과 덩치이지만, 자연의 일부로 담담히 살아갈 뿐이다. 3000년간 살면서 200년에 한 번 깨어나 3년간 활동한다. 식물, 흙, 바위를 주식으로 먹는다. 금을 캘 줄도 알지만, 관심 밖. 커다란 호박을 귀에 거는 걸로 족하다. 밤새도록 별을 바라보고 읊는 그들의 목소리는 낮고 심오한 음조로 짜여 있어 천상의 음악이 된다.
혀와 이를 포함한 온몸에 박힌 문양은 각각의 대상과의 교감에서 나온다. 루스모어는 거인의 문양을 살피며 나무, 식물, 동물 등의 모양을 알아챈다. 몸의 그림은 교감의 증거이자, 그들만의 표현 방식이다. 거인 안탈라의 등짝에 루스모어의 형태가 서서히 드러난다.
아홉 명의 거인과 나눈 우정
거인은 루스모어를 아이처럼 돌봐 준다. 정성껏 만든 음식을 먹이고, 매서운 바람을 막아주는 오두막도 만들어준다. 별을 볼 땐 어깨에 태워 함께 본다. 끄적거리며 자신들을 그리는 작은 존재에게 애정의 눈빛을 보낸다. 이별의 순간이 오자 아파하며 굵은 눈물을 흘린다.
아홉 명의 거인과 루스모어가 그리는 우정은 아름다웠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함께했다. 서로에 대해 관심을 쏟았고, 정도 들었다. 10개월이란 시간을 함께 보낸 후 헤어질 땐 굵직한 눈물도 떨궜다. 그러나 그들은 포개진 선이 아니었다. 아주 짧은 교차점이었다.
거인은 루스모어를 몸에 새겼다. 거인은 루스모어를 조용히 추억할 뿐이었다. 그러나 루스모어는 거인을 세상에 말했고,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에 처넣는다.
별을 노래하는 거인과 명성에 눈이 먼 인간
루스모어의 이야기를 보고 들을 존재는 불특정 다수의 ‘인간’이었다. 거인과 헤어진 후 집으로 돌아간 루스모어는 전투적으로 일에 착수한다. 자신이 보고 기록한 거인에 대한 모든 것을 갈아 넣어 아홉 권의 책을 만든다.
책을 본 사람들은 재빨리 거인을 찾아낸다. 교감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소유하기 위해서, 돈을 벌기 위해서다. 손에는 무기를 든 채, 자연을 훼방하며 거인 앞에 우뚝 선다. 루스모어는 명성을 얻었지만 거인은 죽음에 내몰린다. 단 아홉 명 남았던 거인은 멸종하고야 만다.
소중한 존재의 죽음을 목격한 루스모어. 그의 머릿속엔 끝없는 후회와 분노가 샘솟는다. 그 대상은 자신이다. 자신의 행동이 불러온 참사에 어찌할 바를 모른다. 원했던 바가 명성과 인정이었음을 깨닫는다. 자신의 선택이 소중한 존재를 박살냈다는 사실에 참을 수 없이 슬퍼한다.
그는 더 이상 거인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열렬히 뛰어들었던 연구도, 글도, 명성도 모두 버린다. 수집품에서 유품이 된 ‘거인의 이’만을 간직한 채 살아간다.
바다밍크, 카리브몽크물범, 바바리사자... 마지막 거인
아마도 거인은 이전에 인간을 만난 적이 있었으리라. 루스모어는 아홉 명의 거인을 만나기 전 110구의 거인족 유골을 발견했다. 거인은 루스모어가 인간 세상에 다다르는 길을 알고 있었다. 그를 데려다주는 길엔 민첩하게 사람들의 눈을 피했다. 헤어지기 전 그의 손에 순금 몇 덩이를 쥐여준다. 사람들이 금을 좋아한다는 것도, 그들의 눈에 띄면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던 것이다.
이야기는 거인의 멸종을 그린다. 현실은 다를까? 역사를 통해 자취를 감춘 여러 종족을 찾아볼 수 있다. 최고급 모피 소재로 주목받은 바다밍크는 약 1860년쯤 멸종했다. 기름과 고기로 인기를 얻은 카리브몽크물범도 1952년 마지막 목격만을 남겼다. 총이 발명되고 스포츠 사냥에서 표적이 된 바바리사자는 1922년 야생에서 멸종했다. 이는 동물원의 인공 사육으로 20여 마리는 생존했다고 알려졌다.
최재천 이화여대 자연과학대학 석좌교수는 추천사를 통해 이제는 쉽사리 보기 힘든 ‘반딧불이’에 주목한다. ‘40~50년 전만 해도 웬만한 시골이면 밤마다 그리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던 반딧불이였지만, 요즘엔 ‘반딧불이가 발견됐다’ 하면 신문에 나고, 축제 등의 이유로 많은 인파가 몰려 반딧불이가 살기 힘들어진다는 설명이다.
그는 학문적인 기록이 결여되더라도 반딧불이와 그 서식지를 지키기로 했다고 회상해 보였다.
“그날 밤 우리는 늦도록 그 주변 산야를 뒤졌지만 기껏해야 서너 마리 정도를 찾았을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우리만 알고 있고 세상엔 알리지 않기로 했습니다. 학문적인 기록에는 작은 구멍이 날지 모르지만 이렇게라도 자연을 가끔 숨겨 줘야 할 것 같았습니다.”(최재천 <마지막 거인> 추천사 중에서)
“침묵을 지킬 수는 없었니?”
단단한 표지, 넓직한 모양새는 동화책을 넘기던 어릴 적 손맛을 부른다. 작은 것 하나하나 살려 섬세한 그림, 수려한 문장은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몰입도를 높인다. 주인공은 별 악의 없이 소중한 존재를 죽음으로 내몬다. ‘나의 행동이 소중한 존재를 잃게 할 수도 있다’는 메시지는 당신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작가는 안탈라의 한마디 “침묵을 지킬 수는 없었니?”를 통해 우리에게 말을 거는 지도 모르겠다. 소중한 무언가를 잃기 전에, 침묵을 지키자고. 자연을 그대로 두고, 멀리서 바라보자고.
‘미국 헝그리 마인드 리뷰상’, ‘독일 라텐팡거상’ 등을 수상하며 전 세계 14개국에서 번역 출간된 <마지막 거인>은 프랑스 작가 프랑수아 플라스가 쓰고 그렸다. 전 세계를 여행하는 그는 몽환적인 그림과 글로 다수의 그림책을 펴냈다. <마지막 거인>은 2002년 국내 발행 이후 15만 부 넘게 판매되는 등 많은 사랑을 받았다. 최근 디자인 등에서 새로운 모습을 장착해 다시 독자와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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