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들의 위대한 법정
오늘의 재판안내
-사건번호: □□□□□
-일시: 20☆★년 ▲월 △일 월요일, 오전 10시
-사건명: "인간이 왜 당신 종에 신경 써야 합니까?"
-장소: ●●법원 425호 법정
[뉴스펭귄 성은숙 기자] 어느 재판에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됐다.
멸종위기에 처한 동물들이 각자의 언어가 아닌 인간의 언어를 빌려 자신의 종이 왜 살아남아야 하는지 인간 앞에서 변론하는 재판이었다.
모든 변론을 마친 동물들은 다시 그들 각자의 언어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인간들의 답변을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존경하는 재판장님,
국가와 국민은 야생생물 보호 및 관리에 관한 법률, 생물다양성 보전 및 이용에 관한 법률, 해양생태계의 보전 및 관리에 관한 법률, 문화재보호법, 수목원 정원의 조성 및 진흥에 관한 법률 등에 따라 야생생물·생물다양성·해양생태계·천연기념물·희귀식물 및 특산식물 등을 보호하고 보전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사회의 재원은 한정된 반면, 보호가 필요한 동식물 종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고 있는 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때문에 우리 인간은 '인류세'라는 단어가 등장할 정도로 인간의 활동이 지구 환경을 바꿔놓았다는 면에서 책임을 통감하면서도 모든 종에 구원의 손길을 뻗긴 어려운 상황에 깊은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불을 발견하고, 고차원의 사고를 할 줄 알며, 모차르트와 셰익스피어 그리고 인권선언문과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탄생시킨 위대한 인간으로서 위험에 내몰린 동물들을 합당한 이유 없이 외면하는 건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멸종위기종 모두를 구할 수 없는 것보단 단 한 종이라도 제대로 구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고 합리적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오늘 이 법정에서 멸종위기에 처한 수리부엉이, 담비, 갯지렁이, 유럽칼새, 멧돼지, 들북살모사, 붉은제독나비, 여우 등 총 8종의 변론을 들었습니다.
이들 가운데 다른 종보다 더 쓸모가 있고, 자원이 될 수 있는 단 하나의 종을 골라 더 많이 신경 써 줄 계획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지난 1972년부터 인간의 법으로 보호받는 행운을 누려 온 수리부엉이(Bubo bubo)는 신성한 법정에서 이 재판 자체를 모독했습니다.
자신들은 어둠이 드리우면 날이 밝아 올 때까지 다른 동물들을 사냥 하면서, 오히려 인간을 향해 수리부엉이 몇 마리를 궂은 날씨를 막는 부적처럼 창고 문에 박아두거나 특별 수당을 받고자 마구잡이로 죽이지 않았느냐고 따져 묻는 '내로남불' 같은 언사를 보였습니다.
게다가 인간이 기근과 병해충을 막기 위해 적당히 뿌렸던 살충제 때문에 서서히 죽어가는 운명에 처했다는 어불성설을 쏟아냈습니다.
그 뿐입니까? 도심의 빛과 소금인 고압선을 '통제할 수 없는 죽음의 그림자' 정도로 취급했더군요. 자고로 자유엔 책임이 따르는 법인데, 자유의지로 고압선에 앉았다가 재수없게 감전사한 어린 부엉이들의 수많은 죽음을 왜 우리 인간에게 돌립니까? 누가 그곳에 앉으라고 시켰습니까?
이기적인 것으로 치면 유럽소나무담비(Martes martes)를 이길 동물이 없더군요.
지구라는 한 집에 함께 사는 가족으로서 서로 가진 것을 좀 나눌 수 있는건데, 탄력 있고 내구성 좋다고 정평이 난 털과 가죽을 조금 가져다 썼다고 우리 인간을 '위선자'라고 비난하는 것도 부족해 재판장님의 어깨를 짓밟은 후 법정을 무단으로 떠나다니요.
담비 스스로 한 말처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담비 가죽 하나가 농부의 15일치 수입과 맞먹지 않았습니까? 주머니돈이 쌈짓돈이라고 우리가 지구 공동체로서 그것 조금 가져다 썼을 뿐입니다.
그런데 멀쩡한 가죽 그것 조금 얻으려고 만들었던 함정·올가미·덫 이야기를 그렇게 과장되게 얘기하면서 인간을 악마처럼 묘사하다니, 정말 경악했습니다.
올가미나 덫에 걸렸을 때 그저 가만히 있었으면 팔다리가 조금 부러지는 것 외에는 별다른 상처를 입지 않았을텐데, 미련하게 몇 날 며칠을 발버둥쳤으니 참혹한 몰골로 죽게 됐을 뿐입니다.
이번 재판의 점입가경은 마지막에 등장한 붉은여우(Vulpes vulpes)였습니다.
속임수를 써서 이 법정에 출석할 수 있는 자격을 얻은 것도 괘씸한데, 우리의 닭과 꿩을 훔쳐가는 주제에 자신들을 그만 사냥하라며 격앙된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까?
설령 지구에서 여우가 전부 없어진다 해도 우리 아이들에게 수많은 우화와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할 일은 없습니다.
공룡이 그 예입니다. 공룡은 아주 옛날에 사라졌지만 여러 형태로 우리 주변에 여전히 남아있고, 우리 아이들은 공룡에 대해 잘 배우고 있습니다. 아 물론 공룡이 파충류 같은 피부였는지, 닭처럼 털이 있었는지 그런 건 정확히 알 순 없지만 석유를 뽑아내는 일에 그까짓 게 무슨 대수이겠습니까.
또 여우 한 마리가 한 해에 들쥐 6000마리를 없애준다 한들, 여우가 없더라도 인간에겐 쥐가 피 흘리는 걸 멈추지 못하게 막아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화학약품이 있어 걱정 없습니다.
제일 역겨운 것은 이 여우는 인간의 도시에 있는 공원, 골프장, 쓰레기 처리장을 가리지 않고 들어가 우리의 쓰레기를 닥치는 대로 주워 먹는다는 겁니다. 결코 우리 인간이 보기에 좋은 모습은 아니라고 할 수 있죠.
존경하는 재판장님,
우리 인간은 신이 부여한 권한으로 이들을 일방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이 법정을 마련했고, 이 법정에 나온 8종의 동물을 비롯해 수많은 동물들에게 스스로를 변론할 수 있도록 인간의 언어를 빌려줬습니다.
동물에게 정말로 호의적인 인간은 겨우 한 줌 뿐인데도, 동물을 인간과 같은 지위로 끌어올려주고 똑같은 권리까지 주었죠.
그런데 이들은 우리 인간의 케케묵은 잘못 또는 사소한 실수를 기어코 끄집어 내놓고,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라며 감히 역제안을 하고 있습니다.
법정에 난입한 비버는 재판장 자리에 앉아 인간 딱 한 종만 사라진다면 다른 모든 생물을 구할 수 있다며 이기죽거렸죠. 무당벌레는 어떻습니까? 우리 인간이 그저 1000만 종 가운데 한 종류일 뿐이라는 가당치도 않는 소릴 내뱉었습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오늘 법정에 모습을 드러낸 동물들은 우리 인간이 보호하건 말건, 목숨을 구해 주겠다고 결정하건 말건, 호감이 있건 말건, (심지어)인간이 멸종하건 말건, 아무튼 살아갈 거라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사회를 전부 뜯어고치고 다시 일으켜 세우지 않는 이상 이번 재판에서 이들의 운명을 결정해야 합니다. 자, 이제 어느 종을 신경 써 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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