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에 철새들의 날갯짓이 펼쳐지는 이곳. 발 아래 가장 낮은 곳엔 몸길이 8~10cm, 자세히 보려고 노력해야만 보이는 아주 작은 생명이 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작디작은 몸을 뚫고 뛰는 심장까지 보인다.
가죽처럼 매끈한 피부는 햇빛을 받아 은빛으로 반사되고, 꼬리는 몸보다 길어 균형 잡힌 곡선을 그린다. 땅이 미지근하게 데워지면 순간 지표로 올라왔다가, 위험을 감지하면 단숨에 사라진다. 모래를 얕게 파고드는 습성 덕분에 작은 굴을 남기고, 부화한 새끼들은 손톱만 한 크기지만 성체처럼 민첩하다. 경북 구미시에서 콘크리트를 꿋꿋이 이겨낸 표범장지뱀(멸종위기야생생물 Ⅱ급)이다.
모래를 파고 드나들며 살아가는 이 종은 원래 태안군 신두리 해안사구처럼 고운 모래사구에서 발견됐다. 이런 가운데 파크골프장과 자전거길이 들어선 구미 해평습지에 대규모 서식할 가능성이 있다는 건 역설적이다. 자연 모래톱이 사라진 자리, 인공적으로 굳어진 섬 위에서 이 종이 적응하며 살아남았다는 걸 몸소 보여주고 있다.
구미 해평습지는 원래 강 수위가 오르면 잠기고 낮아지면 드러나는 모래섬(하중도)이었다. 그러나 4대강 사업 당시 준설한 모래가 이곳에 대량 투입되면서 지형이 크게 달라졌다. 물에 잠기던 모래섬은 더는 잠기지 않는 인공 지반으로 굳었고, 그 위에 풀과 관목이 뒤덮인 안정 지대가 만들어졌다.
지형이 달라지고 모래 구조가 뒤엉켰지만, 표범장지뱀은 이 변화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모래흙이 덮이는 과정에서 살아남은 개체들이 변화한 환경에 적응하며 개체군을 이어온 것이다. 한국환경지리연구소 구교성 박사는 "과거에는 이런 곳에선 살지 못할 거라고 단정해 조사가 거의 없었다"며 "깊이 들어가 보면 생각보다 많은 개체가 활동하고 있어 놀랐다"고 말했다.
지난해 이곳은 전문가들 사이에서 표범장지뱀 국내 최대 서식지 가능성이 제기됐다. 국립생태원 전국자연환경조사 기록을 보면 2015년 해평습지에서 4개체가 확인됐지만, 이후 공식 조사 기록이 없었다. 표범장지뱀은 한 번 발견되면 소수가 아니라 여러 개체가 동시에 관찰되는 특성이 있어 실제 개체군은 기록보다 훨씬 더 많을 가능성이 크다. 어디에 얼마나, 몇 개체가 사는지 정확한 수치로는 아무도 모른다.
구미시 역시 표범장지뱀 서식 사실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난해 4대강 이후 기착하지 않던 흑두루미의 서식지를 조성하는 사업을 추진하다 표범장지뱀 포획·이주가 필요해지면서 비로소 여론에 알려졌다. 구미시 환경정책과 관계자는 "2017년까지는 공식적으로 발견된 사실이 거의 없었다"며 "2022년쯤부터 내륙에서 가장 많을 가능성이 제기됐다"고 말했다.
표범장지뱀은 몽골·중국·한국에 걸쳐 분포하는 종이지만, 한국에서는 모래톱이 급격히 사라지면서 전 세계 유일하게 멸종위기종으로 지정됐다. 이들은 단단한 모래 기반과 50% 정도 개방된 지면, 그리고 풀숲이 적당히 섞여 있어 뛰어다닐 빈틈이 있는 지형을 좋아한다.
구미 해평습지는 자연 사구와는 전혀 다른 구조지만, 덮여진 모래와 얇은 식생이 뒤섞여 표범장지뱀이 살아갈 만큼의 조건을 갖춘 독특한 환경으로 유지되고 있다. 표범장지뱀 대표 서식지인 신두리 해안사구는 고운 모래와 적은 식생이 특징이지만, 구미 해평습지는 그 반대다. 그럼에도 이 종은 모래와 식물 사이 작은 틈, 햇볕이 드는 지점, 얕게 파고들 수 있는 지층을 활용해 살아가고 있다. 구교성 박사는 "사람 기준으로는 사구가 아니니 못 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종에게 필요한 조건을 우리가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며 "이런 환경에서도 살아남았다는 건 그동안 알지 못했던 생태적 유연성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표범장지뱀은 기후 영향을 많이 받는다. 기온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월동을 준비하고, 겨우내 잠을 자다가 따뜻해지는 기온에 맞춰 땅 위로 나온다. 구미에서 확인된 개체군 역시 낮은 온도에서는 모래 아래에 숨어 있다가 따뜻해지면 지표로 올라오는 전형적 행동을 보인다. 7~8월에는 부화한 새끼들도 활발히 움직인다. 올해 여름 지표면에 나온 새끼 개체들이 파크골프장 인근 차량·자전거에 의해 로드킬되거나 수로에 빠져 폐사한 사례가 있었다.
표범장지뱀은 4대강 사업 이후 모래톱이 사라지면서 과거 알려진 서식지에서는 거의 절멸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남아 있는 모래 기반 서식지는 일부 사구를 제외하면 극히 제한적이며, 국내 파충류 중 멸종 위험이 가장 큰 종으로 꼽힌다. 구교성 박사는 "4대강 사업 이후 표범장지뱀 서식지는 거의 90% 이상 사라졌을 것"이라며 "서식지 면적만 보면 한국에서 가장 먼저 사라질 종"이라고 말했다.
이들 멸종 위험은 번식력에서도 드러난다. 한 번에 알을 3~4개 정도만 낳고, 부화 즉시 독립해 살아가는 파충류 특성상 생존율이 높지 않다. 그럼에도 먹이·은신처·모래 기반만 갖춰지면 스스로 회복할 능력이 있다. 해평습지에서 살아남은 것도 이러한 가능성을 보여준다.
구미 해평습지 개체군은 자연 모래톱이 남긴 흔적 위에서 적응해 콘크리트가 뒤덮이는 과정에서도 살아남은 집단이다. 한국 하천 모래 생태계의 마지막 조각을 잇는 생물학적 가치가 크다. 보전 핵심은 단순하다. 살아갈 수 있는 땅을 유지하는 것이다. 구교성 박사는 "조건만 조금 갖춰져도 스스로 번식해 개체군을 유지하는 종이다. 이곳에서의 생태적 의미가 매우 크다"며 "아직은 살아남아 있다는 것만 알 수 있다. 잘 적응한 건지,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지 현재 이들이 처한 상황을 파악하는 게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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