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르테르 Robin Boulé] 전통적인 에어컨 대신 도시 전체를 식히는 ‘도시 냉방망’이 유럽에서 주목받고 있다. 파리에서는 세느강의 시원한 물이 800여 개의 건물을 냉각하고 있다. 이와 같은 냉방 방식은 에너지 효율이 높고 온실가스 배출도 적어 친환경 냉방 대안으로 주목받는다.
세느강 아래에는 거대한 냉방 시스템이 숨어 있다. 파리 중심 베르시 지역 지하에는 ‘프레슈르 드 파리(Fraîcheur de Paris)’ 냉방 센터가 자리하고 있으며, 이곳에서 도시 곳곳으로 차가운 물이 공급된다. 기자가 현장을 찾았을 때, 통신 책임자 팀 기공(Tim Guigon)은 “이건 거대한 에어컨입니다”라고 말하며 귀마개를 건넸다. 수십 미터 위로는 평화롭게 산책 중인 시민들이 있었지만, 그 아래에서는 수십 킬로미터에 달하는 냉각관이 작동 중이었다.
세느강 냉기로 루브르·오페라까지 냉방
이 도시 냉방 시스템은 1978년부터 가동되기 시작해 현재는 총 100km 이상의 냉각관이 870개 건물에 냉기를 공급하고 있다. 이 중에는 루브르 박물관, 국립의회, 오페라 가르니에, 퀸즈벵 병원, 포럼 데 알 쇼핑몰 등 주요 공공기관과 문화시설이 포함된다.
도시 냉방망은 에너지 전환의 모범 사례로 꼽히며 점차 확장 중이다. 팀 기공은 “앞으로 20년 안에 250km까지 연장하고, 2050년까지는 주거용 건물에도 냉방을 제공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파리 외에도 리옹, 마르세유, 니스 등도 자체적인 냉방망을 운영 중이지만, 아직까지는 프랑스 전체에서 단 43개 도시에만 존재한다. 반면, 난방망은 1,000개 이상이다.
도시 냉방망, 어떻게 작동하나?
이 시스템은 냉각수 루프를 이용해 작동된다. 냉방 센터에서 물을 냉각시킨 뒤 지하의 관을 통해 각 건물로 이동한다. 건물 내부에서는 이 냉각수를 이용해 자체적인 공조 시스템을 가동, 실내 온도를 낮춘다.
여름철 세느강 수온이 낮을 경우에는 별도의 냉각 장치를 멈추고 자연 냉방을 이용하는 ‘프리쿨링(Free Cooling)’이 가능하다. 이 방식은 전기 사용을 크게 줄일 수 있으며, 사용되는 전기도 대부분 재생에너지 기반이다.
또한, 파리 냉방망은 필요할 때 냉기를 저장해두었다가 수요에 따라 방출하는 기능도 갖추고 있다. 얼음 형태로 저장된 냉기는 피크 시간에 효과적으로 사용된다.
왜 더 확산되지 않을까?
이처럼 고효율·저탄소 냉방 시스템임에도 불구하고 확산은 더딘 편이다. 냉방 수요가 급증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050년까지 전 세계 냉방 수요가 두 배로 증가할 것이며, 2022년 미국 연구에 따르면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의 4%는 냉방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프랑스 공공기관 세레마(Cerema)의 냉방·난방망 담당 엔지니어 뤽 프티팽(Luc Petitpain)은 “건물 구조상 기존 라디에이터 등과 호환이 어려운 경우가 많아 신축 건물에는 적용이 쉬우나, 기존 건물은 난항을 겪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많은 건축 설계사나 건물주들이 냉방 수요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점도 문제다. 실제로 니스의 ‘메리디아’ 냉방망은 일부 건물의 건축이 끝난 뒤에야 도입되어, 주요 건물과 연결되지 못한 채 과잉 설비가 되었고, 그르노블의 경우에도 수요 예측 오류로 과잉 용량 문제가 발생했다.
도시 열섬 현상에 대응하는 해법
세레마는 프랑스 전역의 냉방 수요를 지역별 기후와 도시 열섬 분포를 기준으로 분석했다. 특히 아파트 비중이 높은 일드프랑스 지역은 냉방망의 주요 타깃 지역으로 분석됐다. 뤽 프티팽은 “지자체가 이 시스템을 더 잘 이해하고 도입할 수 있도록 데이터를 제공 중”이라고 말했다.
다만, 냉방망은 지리적 제약도 크다. 인구 밀도와 냉기원을 동시에 충족해야 하기 때문이다. 시프트 프로젝트의 엔지니어 레미 바뷔(Rémi Babut)는 “강, 호수, 바다 같은 냉수원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더 이상 14도 에어컨 시대는 끝났다”
세계 최대 냉방망을 운영하는 카타르 도하에서는 페르시아만의 수온이 여름에 30도에 달해 강력한 냉각이 필요하다. 반면 파리의 세느강 수온이 29도에 육박할 때는 일부 냉수가 다소 미지근해지기도 한다. 이에 대해 팀 기공은 “이제는 외부가 34도라고 해도 실내 온도를 14도까지 낮추는 시대는 끝났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 시스템도 전력을 많이 사용한다. “파리 전체에서 가장 많은 전력을 사용하는 시설 중 하나”라며 팀 기공은 인정했다. 또 여전히 일부 냉각기에는 강력한 온실가스인 HFC(수소불화탄소)가 포함돼 있다. 하지만 개별 에어컨에 비해 냉매 유출량은 20배가량 적다.
현재 프레슈르 드 파리는 HFC 대신 물을 사용하는 신형 냉방 장치를 개발 중이나, 아직은 성능이 낮고 초기 단계에 머물고 있다. 기공은 “우리가 너무 늦게 깨어난 건 맞다”고 털어놨다.
냉방이 아닌 ‘시원함’이 필요해
레미 바뷔는 프랑스가 이런 시스템 도입에 뒤처진 이유로 “그동안 굳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남부 지방에서는 그늘 만들기, 낮잠 자기, 블라인드 치기 등 문화적 적응이 오랫동안 이어져 왔다.
그는 “냉방(cooling)과 쾌적함(refreshing)을 구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냉방은 에어컨처럼 온도를 직접 낮추는 활동이고, 쾌적함은 건물 설계와 통풍, 차양, 팬 등을 활용해 간접적으로 온도를 낮추는 것이다.
레미 바뷔는 “프랑스 전력이 상대적으로 저탄소이므로, 에어컨을 무조건 배척할 것이 아니라, 고령자 등 취약층을 위한 전략적인 냉방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결국 폭염에 대응하려면 도시 전체의 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데 의견이 모인다. “나무를 심고, 땅을 투수성 있게 바꾸는 등 도시 자체를 식혀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하지만 현실은 아직 먼 이야기다. 프랑스 내 가정용 에어컨 보급률은 2017년 11%에서 2019년 말 22%로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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