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대 연구강의동 주차장 벽면 배수관에서 성충 장수가위벌이 나오는 모습. (사진 이수연 기자)/뉴스펭귄
서울교대 연구강의동 주차장 벽면 배수관에서 성충 장수가위벌이 나오는 모습. (사진 이수연 기자)/뉴스펭귄

"이런 곳까지 찾아 알을 낳는다는 게 대단하면서도 짠하죠."

도심 한복판 콘크리트 배수관 안에서 야생벌이 태어났다. 오래된 나무의 구멍이나 바위틈에 알을 낳아야 할 벌이 마땅한 공간이 없어 방황하다 어렵사리 찾아든 곳이다. 햇빛이 내리쬐면 급격히 뜨거워져 산란에 적합하지 않은 곳인데도 벌들이 제법 잘 버틴다는 소식도 들린다. 최근 갑자기 찾아온 폭염에 번식 환경이 열악하고 건강하게 태어나도 한 달 남짓 짧은 생을 살지만, 그래도 힘찬 날개짓을 이어가고 있다.  

사람들은 벌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흔히 '꿀벌'을 떠올린다. 양봉을 위해 길러진 꿀벌도 생태계에서 맡은 역할이 있지만 야생벌 역시 매우 중요한 일을 한다. 상대적으로 꿀벌보다 꽃가루를 더 많이 옮겨 생태계를 지탱하기 때문이다. 특히 가위벌은 침이 없어 사람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나라 도심에 사는 야생벌에 대한 연구나 조사는 거의 없다. 

이 배수관 속 벌들은 수년째 연구의 대상이기도 한 야생벌, 장수가위벌이다. 신동훈 서울교대 과학교육과 교수는 2022년부터 이들이 산란을 위해 나뭇잎을 잘라 옮기는 모습을 관찰해왔다. 장수가위벌은 넓은 잎사귀를 턱으로 동그랗게 오려 산란방을 만드는 특성을 지니는데, 당시 쪽동백나무 잎을 자르던 벌들이 어디로 향하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그러다 지난해 잎사귀를 문 채 주차장 벽면으로 이동하는 벌들을 포착했고, 올해 마침내 콘크리트 배수관에서 태어난 성충이 밖으로 나오는 장면을 목격했다. 장수가위벌은 본래 고목의 구멍이나 바위틈에 알을 낳지만, 도심에는 그런 공간이 부족해 배수관 안에 산란방을 만든 것이다.

실제로 지난달 25일부터 수컷 장수가위벌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해 이달 3일 기준, 주차장 벽면의 79개 배수관 구멍 중 16개에서 수컷 33개체가 출현했다. 수컷은 암컷과 달리 얼굴에 노란색 털이 있는데, 암컷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장수가위벌은 6월 말부터 7월 말까지 짧은 기간만 활동한다. 가장 먼저 우화해 밖으로 나오는 수컷은 짝짓기 직후 죽고, 암컷은 짝짓기 후 산란방을 마련해 알을 낳은 뒤 생을 마감한다. 암컷은 알의 성별까지 조절할 수 있는데, 암컷이 될 알은 가장 깊숙한 곳에 배치해 보호한다.

수컷 장수가위벌. (사진 이수연 기자)/뉴스펭귄
수컷 장수가위벌. (사진 이수연 기자)/뉴스펭귄
성충이 돼 밖으로 나온 수컷 장수가위벌. 한 달간 활동하다가 짝짓기 후 생을 마감한다. (사진 이수연 기자)/뉴스펭귄
성충이 돼 밖으로 나온 수컷 장수가위벌. 한 달간 활동하다가 짝짓기 후 생을 마감한다. (사진 이수연 기자)/뉴스펭귄

가위 같은 턱으로
산란방 만드는 장수가위벌

장수가위벌은 일본과 중국에만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흥식 농림축산검역본부 박사의 발견으로 국내에서도 서식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를 토대로 국가생물종목록에도 추가됐다.

장수가위벌은 종종 비슷한 가위벌인 왕가위벌과 외형이 비슷해 혼동되기도 하지만, 두 야생벌의 생김새와 생태는 엄연히 다르다. 장수가위벌은 머리가 가늘고 넓은 잎사귀를 자르기 위해 턱의 절단면이 발달해 있다. 반면 왕가위벌은 머리가 동그랗고 턱 끝이 가느다랗다. 

산란 방식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장수가위벌은 오래된 나무 구멍이나 바위틈에 산란방을 만들고, 말아둔 잎사귀 속에 꽃가루를 모아 알을 낳지만 왕가위벌은 꿀과 꽃가루를 뭉쳐 만든 먹이를 구멍 안에 넣고, 알을 낳은 뒤 송진으로 벽을 만든다. 이 과정을 반복해 하나의 구멍에 여러 칸의 산란방을 만든다.

나뭇잎 곳곳에 잘려나간 흔적이 보이는 쪽동백나무. (사진 남예진 기자)/뉴스펭귄
2023년 장수가위벌이 산란을 위해 나뭇잎 곳곳을 잘라간 흔적이 보이는 쪽동백나무. (사진 남예진 기자)/뉴스펭귄
올해 장수가위벌이 산란방을 만든 주차장 벽 배수관. 물이 흐르지 않는 배수관이다. (사진 이수연 기자)/뉴스펭귄
올해 장수가위벌이 산란방을 만든 주차장 벽 배수관. 물이 흐르지 않는 배수관이다. (사진 이수연 기자)/뉴스펭귄

학생과 교수,
함께 기록한 야생벌 산란기

신 교수는 장수가위벌이 나오기 직전 주차장 벽면의 배수관 79개 구멍에 미리 투명 관찰통을 설치해 밖으로 나오는 벌들을 기록하고 있다. 몇몇 학생들과 수시로 주차장을 찾아 벌의 성별과 특성을 확인한 뒤 곧바로 방생한다.

관찰의 목적은 단순하다. 학생들의 생태 감수성을 길러주기 위해서다. 그는 "다들 포유류는 관심이 많지만 곤충은 관심 갖지 않으면 모른다"며 "과학에서 가장 중요한 건 관찰인데 내가 직접 관찰하지 않으면서 학생들에게 관찰하라고 할 수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서울교대 과학교육과 3학년 김민아 학생은 "올해 수업에서 이 벌들에 대해 처음 배웠을 때는 이름도 헷갈리고 흥미도 없었지만, 직접 보니까 나중에는 오가면서 혼자 관찰도 하고 궁금해졌다"며 "벌들이 만세하기도 하고 나뭇가지에 떨어지거나 엉덩이를 흔드는 행동을 지켜보니 곤충이 징그럽다는 느낌이 많이 사라졌다. 이 벌들이 학교에서 건강하게 오래 번식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사진 이수연 기자)/뉴스펭귄
학생과 함께 장수가위벌 성별을 확인하는 신동훈 교수. (사진 이수연 기자)/뉴스펭귄
(사진 이수연 기자)/뉴스펭귄
(사진 이수연 기자)/뉴스펭귄

 

"기후위기 영향받는데..."
야생벌 연구는 부족

신 교수는 장수가위벌을 비롯해 서울교대에 산란하는 왕가위벌, 밑들이벌의 수분을 돕기 위해 화단에 코스모스 씨앗과 패랭이꽃 모종을 심었다. 관리 직원에게는 식물을 베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야생벌이 좋아하는 식물을 많이 심고, 잔디는 최대한 적게 조성해 도심 속 야생벌을 보호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가위벌들이 지낼 수 있는 '비하우스(Bee House)'를 설치하는 방법도 제안했다.

꿀벌보다 관심을 덜 받는 야생벌은 오히려 꿀벌보다 꽃가루를 더 많이 옮기며 생태계를 지탱하는 중요한 존재다. 그러나 우리나라 도심에 사는 야생벌에 대한 연구나 조사는 거의 없다. 현재로선 이흥식 농림축산검역본부 박사가 유일하게 연구를 이어가는 것으로 알려진다.

신 교수는 “장수가위벌이 산란한 콘크리트 배수관은 햇빛을 받으면 급격히 뜨거워져 산란에 적합한 조건은 아니지만, 벌들이 아직 잘 버티고 있다"며 "기후위기 영향도 분명히 있을 텐데 정확히는 알 수 없다. 이제는 야생벌에 관한 전문적인 조사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도심 속 야생벌을 보호하는 비하우스. (사진 이수연 기자)/뉴스펭귄
신동훈 교수가 야생벌 수분을 돕기 위해 교정에 심은 코스모스 씨앗. (사진 이수연 기자)/뉴스펭귄
신동훈 교수가 야생벌 수분을 돕기 위해 교정에 심은 코스모스 씨앗. (사진 이수연 기자)/뉴스펭귄
장수가위벌이 산란한 서울교대 연구강의동 뒤 주차장 벽면. (사진 이수연 기자)/뉴스펭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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