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재난을 겪은 사람은 정부에 기후대응 관련 정책을 더 많이 요구할까? 합리적인 질문처럼 보이지만 최근 연구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날씨 관련 대형 재난과 마주하고도 기후정책에 대한 관심을 크게 높이지 않았다. 이를 두고 "재난과 기후변화의 밀접한 연결고리를 사회적으로 더 많이 다루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들린다. 다만, '산불' 만큼은 이런 경향에서 예외였다.
최근 국제학술지 네이처 클라이밋 체인지(Nature Climate Change)에 실린 국제조사 결과에서 뜻밖의 결과가 나왔다.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68개국 시민 7만 명 이상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대부분 재난은 정책 지지를 끌어올리지 못한 반면, '산불'만 유일하게 다른 결과를 보였다. 최근 대규모 홍수 피해를 겪은 미국 사례에서도 기후정책 지지가 제한되는 흐름이 이어졌다.
이번 연구는 영국 오픈대학과 옥스퍼드대학교, 독일 뮌헨공과대학교 공동 연구진이 주도했으며, 2022년부터 2023년까지 시민 7만1천922명을 대상으로 조사했다. 폭염, 폭우, 홍수, 가뭄, 허리케인, 산불, 겨울 폭풍 등 7가지 재난을 얼마나 자주 겪었는지, 각 재난이 기후변화 때문이라고 생각하는지, 다양한 기후정책에 대한 시민들의 지지를 함께 물었다.
연구진은 시민들의 체감도뿐 아니라, 각 나라가 실제로 얼마나 자주 재난을 겪었는지도 객관적으로 살폈다. 최근 몇 년간 일시적인 기억이나 특정 사건이 아닌, 지난 20년 동안 누적된 재난 경험을 기준으로 했다.
폭염과 폭우처럼 기온이나 강수량으로 측정할 수 있는 재난은 과거와 최근을 비교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평균과 2000년대 이후 평균을 비교해 재난의 빈도와 강도가 얼마나 높아졌는지를 계산했다. 또 산불처럼 물리적 피해 범위로 측정할 수 있는 재난은 위성자료를 활용해 2000년부터 2019년까지 매년 불에 탄 면적의 평균치를 집계했다.
이렇듯 시민들이 체감한 재난과 각국에서 실제로 일어난 재난 두 가지 모두 분석한 결과, 대부분 재난은 정책 지지도를 실질적으로 변화시키지는 않았다. 폭염, 폭우처럼 기상변화로 일상에서 겪는 재난은 정책 지지와 뚜렷한 상관관계를 보이지 않았고, 폭우는 오히려 정책 지지가 더 낮아지는 경향도 보였다.
반면 산불은 다른 결과를 보였다. 산불을 자주 겪은 국가에서는 기후정책 지지가 확연히 높았다. 연구진은 "산불은 재난 경험과 정책 지지 간에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양의 관계를 보인 유일한 사례"라고 밝혔다.
산불은 불과 연기가 넓은 지역을 덮는 등 물리적 피해를 남기고, 건강과 직결되는 피해를 동반한다는 이유에서다. 시민들이 직접 위협을 느끼는 강도가 다른 재난보다 크다는 것이다. 연구진은 "산불은 언론보도와 사회적 담론에서 기후위기와 가장 밀접하게 다뤄지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 호주 사례에서는 시민 45%가 산불을 겪은 이후 기후행동 참여가 증가했다고 답했다.
재난 종류에 따라 정책별 지지도 또한 달랐다. 전체 조사 대상국 기준으로 숲 보호 정책에는 82%, 재생에너지 확대에는 75%가 지지한다고 응답했다. 반면 생활비 부담이 우려되는 탄소세에는 '매우 지지한다'는 응답이 22%에 그쳤다. 탄소세는 배출량에 비용을 부과해 온실가스 감축을 유도하는 시장 기반 정책이다.
연구진은 이번 결과에서 특히 언론 보도의 역할을 강조했다. 시민들이 재난을 단순한 이상기후로 인식하는지, 기후위기 결과로 인식하는지는 언론 보도 방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연구진은 "최근 언론과 소셜미디어에서 극한기후를 기후변화와 연결해 다루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재난별 보도 차이도 뚜렷했다. 연구진은 기존 언론 보도 분석 결과를 인용해 "폭우와 같은 재난은 주로 일시적인 날씨 이상으로 소개되고, 산불·폭풍과 같은 재난은 기후위기와 연결해 보도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 차이가 시민들의 기후인식 형성에 영향을 미치고, 정책 지지로까지 이어진다는 주장이다.
연구진은 이번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단순 재난 체감만으로는 정책 수용성이 높아지기 어렵다고 결론 내렸다. 재난을 '기후변화 때문'이라고 인식하도록 돕는 정보 제공과 사회적 대화,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 전략이 기후정책 지지를 높이는 핵심 열쇠라고 강조했다.
한편 최근 사례에서도 정책 지지의 벽이 드러났다. 이번 국제연구는 2000~2019년 데이터 기반으로 조사됐지만, 최근 사례에서도 비슷한 한계가 이어지고 있다.
올해 7월 대규모 홍수 피해를 겪은 미국 텍사스에서는 100명 이상이 숨지는 참사가 벌어졌지만, 홍수를 직접 겪은 시민들 사이에서 정책 지지도에 큰 격차가 나타났다. AP통신과 미국 NORC 공공정책연구센터가 텍사스 홍수 발생 직전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최근 5년간 대규모 홍수를 겪은 미국인 10명 중 7명이 재난 원인으로 기후변화를 지목했다.
하지만 정책 지지로 이어지는 흐름은 상대적으로 낮았다. 전체 응답자 70%는 연방정부가 재난 대응과 피해 복구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답했지만, 기후변화 자체를 막기 위한 정부 개입 필요성에는 절반 수준인 56%만 동의했다.
특히 정당별 차이가 뚜렷했다. 민주당 지지층에서는 약 80%가 정부 개입에 찬성했지만, 공화당 지지층에서는 30% 안팎에 불과했다. 재난 체감과 기후변화 인식이 높더라도, 기후정책 지지는 사회적·정치적 맥락에 따라 다를 수 있음을 시사한다. 기후재난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정책 수용성을 높이기 위해 단순 체감과 인식을 넘어 구체적인 정책 설명과 사회적 담론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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