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행정부가 멸종위기종법상 '해악'의 정의를 '동식물을 고의로 죽이거나 해치는 행위'로 한정하는 규정을 발표했다. (사진 클립아트코리아)/뉴스펭귄
트럼프 행정부가 멸종위기종법상 '해악'의 정의를 '동식물을 고의로 죽이거나 해치는 행위'로 한정하는 규정을 발표했다. (사진 클립아트코리아)/뉴스펭귄

[뉴스펭귄 이동재 기자] 멸종위기종 서식지를 훼손했어도 특정 종을 의도적으로 죽이거나 해친 게 아니라면 법적 책임을 면하게 한다는 규정이 최근 미국에서 발표됐다. 현지 환경 단체 등은 "미국 멸종위기종 보호 역사상 가장 심각한 후퇴"라며 비판하고 나섰다.

트럼프 행정부가 미국이 50년간 유지해 온 멸종위기종 보호법(이하 멸종위기종법)을 대폭 축소하는 새로운 규정을 발표했다. 미국 석유협회는 환영하고 나섰고, 환경 단체들은 일제히 반발했다.

워싱턴포스트, 뉴욕타임즈, AP통신 등 외신들은 지난 17일(현지 시간) 트럼프 행정부가 멸종위기종법상 해악(harm)의 정의를 '동식물을 고의로 죽이거나 해치는 행위'로 한정하는 규정을 발표했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미국 어류 및 야생동물국(U.S. Fish and Wildlife Service)과 미국 해양수산국(National Marine Fisheries Service)이 공동 발표한 규정 개정안 초안에는 “서식지 변경은 종을 의도적으로 겨냥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해악’이 될 수 없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동물이 먹이를 찾거나 번식하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서식지를 파괴하는 행위는 ‘해악’으로 간주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1973년 제정된 멸종위기종법은 멸종위기종으로 지정된 동식물을 포괄적으로 보호하고 이들에게 해악을 끼치는 행위를 금지해 왔다. 지난 수십 년간 미국 정부는 멸종위기법상 해악이라는 단어를 ‘멸종위기종의 서식지를 파괴하는 행위’로 해석해 왔다. 

이러한 해석은 대법원 판결에서도 이미 드러난 바 있다. 1995년 벌목 회사들이 멸종위기종인 점박이올빼미(northern spotted owl)와 붉은벼슬딱따구리(red-cockaded woodpecker)의 서식지인 숲을 벌목하려 했을 때, 대법원은 정부가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서식지 파괴를 금지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

미국 대법원은 1995년 벌목 회사들이 멸종위기종인 점박이올빼미의 서식지인 숲을 벌목하려 할 때, 정부가 올빼미들을 보호하기 위해 서식지 파괴를 금지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 (사진 wikimedia commons)/뉴스펭귄
미국 대법원은 1995년 벌목 회사들이 멸종위기종인 점박이올빼미의 서식지인 숲을 벌목하려 할 때, 정부가 올빼미들을 보호하기 위해 서식지 파괴를 금지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 (사진 wikimedia commons)/뉴스펭귄

트럼프 행정부가 꺼내놓은 새 규정이 적용되면 동물을 총으로 쏘는 등의 직접적인 행위만이 불법이 된다. 당국은 이 같은 개정이 "연방 정부가 기업 활동에 부담을 주는 규정을 만들 수 있는 권한을 제한했던 최근 대법원 판례와, 수백 년에 걸쳐 이뤄져 온 법적 해석에 부합하는 조치"라며, “개정은 불필요한 규제 부담을 줄이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미국 석유협회(American Petroleum Institute)는 새 규정에 대해 환영의 뜻을 밝혔다. 석유협회 대변인은 “야생동물 보호와 미국의 에너지 우위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합리적 멸종위기종법 정책에 대해 행정부와 협력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반면 미국 환경 단체들은 새로운 규정에 대해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미국 멸종위기종 보호 역사상 가장 심각한 후퇴라며 비판의 날을 세웠다.

미국 멸종위기생물센터(Center for Biological Diversity) 노아 그린왈드(Noah Greenwald) 국장은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트럼프 행정부가 제안한 새로운 규정은 지난 40년간 우리가 멸종위기종을 보호해 온 방식을 완전히 뒤엎는 조치”라며 "멸종위기종법의 본질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소리를 높였다.

환경 법률 단체 어스저스티스(Earthjustice)의 선임 변호사 크리스틴 보일스(Kristen Boyles)는 “서식지 파괴가 멸종위기종에 대한 해악이 아니라는 발상은 법적으로도 생물학적으로도 모두 터무니없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보일스 변호사는 “이는 개발 업자가 멸종위기에 처한 거북이나 물고기가 살아가고 있는 연못을 말려버려도 그게 ‘해악’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라며, "이는 명백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어스저스티스는 해당 규정이 확정되면 법적 대응에 나설 것이라고 표명한 상태다.

이번 개정안 초안은 오늘 18일 연방 관보(Federal Register)에 게시 후 30일간의 의견 수렴 기간을 거쳐 확정 여부가 결정된다. AP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어류 및 야생동물국 대변인은 관련 사항 문의에 대해 내무부로 답변을 넘겼고, 내무부는 공식 논평을 거부한 상태다.

외신들은 각계의 반발과 법적 대응이 예고된 가운데, 향후 30일간의 의견 수렴 과정이 이번 사안의 분수령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

한편 이번 개정안은 트럼프 1기 행정부가 시도했던 규제 완화 정책보다 한층 더 과격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트럼프 1기 행정부는 2017년 트럼프 대통령 취임 직후부터 각종 환경 규제를 ‘기업 활동을 방해하는 불필요한 부담’으로 규정하고, 환경 관련 규제 완화를 추진해왔다. 

특히 2019년에는 멸종위기종법을 정면으로 겨냥해 멸종위기종 보호 조치를 내릴 때 경제적 영향을 고려하도록 하고, 잠재적 서식지의 기준을 높이는 등 대대적인 개정안을 발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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