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란 수의사.
이영란 수의사.

[뉴스펭귄 이수연 기자] 우리나라 최초로 고래를 부검한 이영란 수의사. 평범한 동물병원 수의사였던 그는 우연히 해양 스포츠를 접한 후 돌고래를 구조하고 치료하는 일에 매료됐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그런 길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직접 길을 개척했다.

국립수산과학원 고래연구소에서 첫 수의사 연구원으로 시작해 고래와 함께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일했다. 고래 부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달려갔다. 최근에는 공익법인 플랜오션을 설립해 비임상 수의사로 지내고 있다.

누구보다 고래와 가까이 만나온 그는 바다 아래로 영영 가라앉을 뻔한 이야기들을 부검을 통해 밝혀낸다. 거창한 사명감보다는 '고래가 예뻐서'다. 세계 고래의 날을 맞아 이영란 수의사만이 해줄 수 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1장. 고래를 가장 가깝게 보는 사람

오른쪽 이영란 수의사. (사진 플랜오션 제공)/뉴스펭귄
상괭이를 부검하는 이영란 수의사(오른쪽). (사진 플랜오션)/뉴스펭귄

-고래를 사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과거엔 그저 수산물로만 봤지만, 포유류인 고래가 사람처럼 눈을 마주치고 임신도 하고 출산도 한다는 사실에 놀랐어요. 먹는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존재라는 점에 끌렸어요."
 

-국내 1호 '고래 부검의'로, 가장 기억나는 사례는 무엇인가요
"처음 부검했던 대형고래인 참고래에서 플라스틱 쓰레기가 많이 나왔고, 뱀머리돌고래 위 속에 코팅된 종이가 가득했던 적도 있는데 이런 일은 자주 발생해요. 한번은 막 숨진 상괭이를 부검했는데, 온몸에 염증이 퍼져 있었고 폐에는 기생충이 가득했어요."
 

-고래 부검은 얼마나 자주 이뤄지나요
"기본적으로 우리나라는 죽은 고래를 부검할 수 있는 인프라가 부족합니다. 이 일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많고 그물에 걸리는 고래도 상당한데, 부검 기회는 드물죠."
 

-부검을 통해 바다의 위기를 체감하나요
"죽어나가는 수를 보면 느낄 수밖에 없어요. 특히 상괭이 모든 장기에서 미세 플라스틱이 나오는데 바다가 위험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는 지점이죠. 우리가 육지에서 사용하는 농약이나 코팅팬 제조할 때 들어가는 화학물질은 물에 녹지 않고 상괭이 같은 해양 포유류 몸에 평생 쌓입니다."

 

2장. 혼획된 고래, 숨겨진 진실

(사진 플랜오션 제공)/뉴스펭귄
참고래를 부검하는 이영란 수의사. (사진 플랜오션)/뉴스펭귄

-해양 포유류가 인간 탓에 죽는 큰 이유가 '혼획'인데, 가장 필요한 대안은 무엇인가요
"우리나라는 그물에 걸린 고래가 스스로 빠져나올 수 있는 기술까지 있는데 이를 보급할 법적 근거가 없어요. 미국은 수입하는 수산물에도 혼획 최소화를 요구하는 법이 있어 우리나라 어민들도 영향을 받는데, 우리도 그런 법이 필요합니다.

사실 그물에 걸린 고래도 빨리 풀어주면 살 수 있어요. 하지만 어민들이 항상 현장에 있을 수 없고 시간도 오래 걸리니 풀어주는 일이 드물죠. 최근 한 해양경찰이 '그물에 감지 센서를 달고, 고래가 걸리면 해경이 출동해 풀어주는 방식'을 제안했는데 반가웠어요. 이런 논의를 현실화하려면 시민이 나서야 해요. 아직 해양생물이 수산물로만 여겨지기 때문에 입법이나 정책의 초점은 어민들에게만 맞춰져 있거든요."
 

-지속가능한 어업이 중요하다는 말인가요
"바다를 지키기 위해 어업 자체를 금지할 수는 없지만, '봄에 젓새우를 잡는 동안 상괭이가 너무 많이 죽는다'면 안 먹을 수는 있죠. 지속가능한 어업을 위해선 기업과 시민, 어민이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만약 소비자가 지속가능한 어업으로 생산한 수산물의 가치를 알아준다면 기업들은 그 상품에 더 주력할 것이고, 어민들은 더 정당한 값에 팔 수 있으니 어업 관행은 당연히 바뀝니다."
 

-실제 긍정적인 변화도 있나요
"우리나라에서 '책임 있게 생산된 양식 인증(ASC)'은 기존에 다시마나 김만 받았는데 얼마 전 최초로 광어도 ASC 인증을 받았어요. 어류를 양식할 때 발생하는 환경오염은 다시마 키울 때보다 크다는 점에서 좋은 소식이죠."

 

3장. 고래가 살아야 우리도 산다

(사진 플랜오션 제공)/뉴스펭귄
건국대에서 부검 교육하는 이영란 수의사. (사진 플랜오션)/뉴스펭귄

-고래와 가까이 만나면서, 뿌듯한 순간도 있으시죠
"처음에는 고래가 예뻐서 이 일을 시작했는데 숨겨진 문제를 하나씩 들추고 변화를 만들어내는 과정이 좋아요. 2020년 참여했던 세계자연보전연맹(IUCN) 멸종위기 상괭이 보전 결의안도 통과됐고 상괭이 서식지 인접한 국가들과 네트워크를 만들기도 했어요. 무엇보다 상괭이 인지도가 예전보다 많이 올라가서 좋아요. 상괭이는 절 움직이게 하고 마음을 울리는 존재인데 많은 사람이 알아주는 자체로 기뻐요."
 

-수의사님만 아는 고래의 비밀 들려주세요
"한때 상괭이는 연간 2000마리씩 잡혔지만 멸종위기종이 되면서 판매도 금지됐어요. 여전히 많은 개체가 그물에 걸려 죽지만, 어차피 팔 수 없으니 대부분 바다에 버려져 통계에는 마치 혼획이 줄어든 것처럼 보여요. 최근 공식적으로 보고된 상괭이 혼획 수는 300마리에 불과하지만 실제 수치는 훨씬 많을 거예요."
 

-우리 바다에도 고래가 많은 편인가요
"고래는 외국에만 있다고 여겨지는데 우리 바다에도 다양한 종이 서식합니다. 동해에는 참돌고래와 낫돌고래, 독도 근처에는 큰머리돌고래가 있고요. 제주도에는 남방큰돌고래가 무리를 이뤄 살아가고 서해와 남해에는 상괭이가 가장 많으며 참고래나 향고래, 보리고래가 가끔 나타나죠. 고래가 우리 바다에서 인간의 영향을 받으며 함께 살아간다는 것을 어릴 때부터 교육한다면 인식 수준도 많이 높아지지 않을까요."

 

4장. 고래를 지키는 삶

미국 몬테레이에서 사망한 고래를 살피는 이영란 수의사. (사진 플랜오션)/뉴스펭귄
미국 몬테레이에서 사망한 고래를 살피는 이영란 수의사. (사진 플랜오션)/뉴스펭귄

-고래를 위한 목표가 있으신가요
"제 꿈은 고래를 10마리에서 100마리로 늘리는 게 아니에요. 파괴적인 어업 관행을 멈추고, 고래가 잘 사는 바다를 만들고 싶어요."
 

-고래를 지키는 삶에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다면
"아무래도 돈이죠. 저와 함께하는 사람들이 자기 하나 잘 살려고 일하는 것도 아니고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들에게 열정만으로 이 일을 해달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시민들이 우리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을 만들어 후원도 늘리려고 합니다."
 

-고래고기 먹는 사람들에 대한 생각은
"마냥 비난하고 싶진 않아요. 5년간 울산 장생포 고래연구소에서 일할 때 고래고기에 어린 시절 추억이 담긴 사람을 여럿 만나기도 했죠. 그럼에도 다른 선택지가 많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요. 몸에 좋지도 않고."
 

-고래가 사람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면, 어떤 이야기를 전하고 싶으세요
"그대들과 같은 시대에 태어나 좋습니다. 이기적인 인간들 때문에 여러분이 고초를 겪지만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만약 인간이 해결하지 못한다면 고래가 멸종하기 전에 인간이 먼저 멸종할 테니까요. (웃음)"

이영란 플랜오션 대표 겸 수의사. (사진 플랜오션)/뉴스펭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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