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의 판결이 나온 뒤 대심판정에서 나와 기자들 앞에 선 청구인과 대변인단. (사진 이동재 기자)/뉴스펭귄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나온 뒤 대심판정에서 나와 기자들 앞에 선 청구인과 대변인단. (사진 이동재 기자)/뉴스펭귄

[뉴스펭귄 이동재 기자]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법 제8조 제1항은 헌법에 합치되지 아니한다."

재판관의 입에서 주문이 나오는 순간 방청석에서는 감격의 탄성이 터져나왔다. 29일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는 정부의 기후위기 대응 부족이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역사적인 판결이 이뤄졌다.

헌법재판소는 이날 영유아와 청소년, 시민단체가 낸 기후위기 헌법소원 네 건을 심리, 재판관 전원 일치 의견으로 탄소중립기본법 제8호 1항이 헌법에 어긋난다고 판단했다. 청소년기후행동의 청소년들이 처음 나서 헌법소원을 제기한지 햇수로 5년만의 일이다.

앞서 2020년 청소년기후행동을 시작으로 여러 시민단체들은 정부의 기후위기 대응이 파리 기후협정 등 국제적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며 잇따라 헌법소원을 청구했다. 이는 아시아에서는 처음 정부를 상대로 제기된 기후 소송이었다.

정부 측은 현실적인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세울 필요가 있었고, 감축을 위한 다양한 정책을 이미 시행하고 있어 기본권 침해가 아니라고 반박했지만, 헌법재판소는 정부의 기후위기 대응 부족으로 인한 기본권 침해를 인정했다.

2031년부터 감축 계획 없어...2026년까지 법 조항 개정해야

이번에 재판관들이 일치된 의견으로 헌법불합치라고 판단한 탄소중립기본법 제8호 제1항은 2030년까지 국가 온실가스 배출량을 2018년 대비 35% 이상 감축하는 것을 중장기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로 규정하고 있는 조항이다.

헌법재판소는 탄소중립기본법이 2050년까지 온실가스 순배출량을 '0'으로 만든다고는 하지만, 해당 조항이 2031년부터 2049년까지 19년간의 감축 목표에 관해서는 어떤 기준도 제시하지 않았고, 2050년 탄소중립 목표 시점에 이르기까지 감축을 담보할 수 있는 장치가 없어 미래 세대에 과중한 부담을 이전한다고 지적했다.

이는 기후위기라는 위험 상황에 상응하는 보호조치로서 필요한 최소한의 성격을 갖추지 못한 것이고 결과적으로 국민이 건강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살 권리인 환경권을 침해하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헌법재판소는 탄소중립기본법 조항의 위헌성을 인정했지만, 법의 효력이 즉각 상실될 경우 혼란이 생길 것을 우려해 취소 결정을 하지 않고, 국회가 2026년 2월 28일까지 헌법재판소의 결정 취지를 반영해 법 조항을 개정하도록 했다.

이소영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은 재판이 끝난 후 기자들과 인터뷰에서 "2035년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와 그 이후의 중장기 감축 목표에 대해서 더 과감하고 가열찬 기후 입법을 해야 하는 것이 분명해졌다"고 평가하면서 발빠른 대체입법 발의를 약속했다.

2030년 감축 비율 등에 대한 청구는 기각...아쉬운 부분도

한편 이날 헌법재판소는 2030년까지 온실가스 감축 비율을 40%로 정하는 등 기후위기 대응과 관련한 다른 현행법 조항에 대해선 헌법소원 청구를 기각했다. 2030년까지 온실가스 40%를 감축하겠다는 목표 자체는 중간 목표에 해당해 당장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지는 않는다고 본 것이다.

2023년부터 2030년까지의 부문별 및 연도별 감축 목표에 대해서는 재판관 9인 중 5인이 위헌 의견을 냈으나 정족수인 6인을 넘지 못해 위헌 결정이 내려지지 않았다.

위헌 의견을 낸 5인의 재판관은 기준연도인 2018년도와 목표연도인 2030년에 똑같은 '국가 온실가스 배출량'이라는 표현을 쓰면서도 배출량 산정 방식을 총배출량에서 순배출량으로 자의적으로 변경, 기후위기를 완화하는 조치의 수준을 낮췄다"고 지적했다.

기각 의견에서는 논란이 된 배출량 산정 방식을 구체화한 규정이 없고 부문별 감축수단의 선택과 조정에 관련된 정부의 권한 행사에 위법사유 또는 명백한 재량일탈을 발견하기 어렵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청구인단은 이번 판결이 정부의 기후위기 대응책이 부실하면 환경권 침해로 볼 수 있다는 것이 처음으로 인정됐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사진 이동재 기자)/뉴스펭귄
청구인단은 이번 판결이 정부의 기후위기 대응책이 부실하면 환경권 침해로 볼 수 있다는 것이 처음으로 인정됐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사진 이동재 기자)/뉴스펭귄

청구인들은 이에 대해 아쉬움을 표하면서도 이번 판결로 인해 정부의 기후위기 대응책이 부실하면 환경권 침해로 볼 수 있다는 것이 처음으로 인정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으며, 정부가 이를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청소년기후소송 법률대리인 이병주 변호사는 "결정의 내용 중에 다소 아쉬운 점이 있으나, 독일 기후 소송의 경우처럼 우리나라 국회의 후속 법규 제정 과정에서 온실가스 감축 목표 전체에 대해서 실제적인 강화가 이뤄질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아기기후소송 법률대리인 김영희 변호사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우리 사회 전체가 규범적으로 온실가스를 더 많이 감축하도록 이끄는 중대한 결단"이라고 평가하면서, "정부와 국회는 헌재의 결정의 취지와 정신에 따라 기후 관련 법과 제도의 전면적인 개혁에 나서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플랜 1.5의 윤세종 변호사 역시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은 헌법재판소법 제47조에 따라 모든 국가 기관에 대한 기속력을 가진다"며, "대한민국 국회와 정부는 헌법재판소에서 정한 기한 내 헌법불합치 결정의 취지에 따라 탄소중립기본법 관련 규정을 개정하고, 미래 세대의 권리를 고려한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제시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아기기후소송단에 참여한 한제아 어린이가 판결이 나온 직후 헌법재판소 앞에서 진행된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 이동재 기자)/뉴스펭귄
아기기후소송단에 참여한 한제아 어린이가 판결이 나온 직후 헌법재판소 앞에서 진행된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 이동재 기자)/뉴스펭귄

시민사회와 환경단체 등에서도 헌법재판소의 이번 판결을 반기며 정부와 국회의 후속 조치를 촉구했다.

세계자연기금(WWF)은 "한국 정부는 일상화되는 기후 재난 시대를 극복하기 위해 관련 정책을 조속히 마련해야 한다"며, " 2030년까지 2018년 대비 온실가스 배출량 40% 감축 목표를 2035년 60%까지 상향 조정하는 것부터 시작해 후속 조치에 나서야 한다"고 밝혔다.

기후솔루션은 "목표인 지구 온도 1.5도를 넘으면 폭염과 홍수 등 더 심각한 재난은 물론 더위가 생태계에서 더 많은 온실가스를 부르고 그 온실가스가 다시 기온을 올리는 ‘티핑포인트’의 위험이 심각하게 올라간다는 게 과학의 경고가 있는 만큼, 다급한 상황에서 2030년 감축 목표에 대해 기각 결정을 내린 점은 아쉬움이 남는다"고 입장을 발표했다.

그러면서도 "안주하고 있을 겨를이 없다"며, "입법부는 조속히 헌법불합치 결정이 난 탄소중립법 8조 1항을 결정 취지에 맞게 새로 짜는 과정에 착수해야 마땅하다. 재판관 과반이 위헌 판단을 내린 취지를 살펴 총배출량과 순배출량의 개념이 혼재한 심각한 오류를 비롯해 기후 위기 대응에 걸맞게 개편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환경부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나온 당일 보도자료를 통해 "헌재의 헌법불합치 결정을 존중한다"며 "후속 조치를 충실히 이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편 네덜란드와 독일 등 국제 사회에서는 기후 소송에서 시민들의 손을 들어준 판결이 잇따라 나오고 있다. 기후소송네트워크(Climate Litigation Network) 공동 디렉터 사라 미드는 “네덜란드, 독일, 벨기에, 유럽인권재판소를 잇는 한국 헌법재판소의 이번 판결은 아시아 최초로서 지역 전체에 중요한 파급효과를 가져올 것"이라며, "전 세계 계류 중인 수십 건의 유사 사건들에도 중요한 선례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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