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스틱이 주식인 행성에 살던 외계인이 식량난으로 지구에 왔다. 플라스틱 컵을 먹기 위해 카페에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주문한 외계인은 커피를 바닥에 휙 버리고, 플라스틱 컵을 와그작 씹어먹는다. 조금만 걸어 나서면 플라스틱이 주변에 쌓여있다. 영화 <클리어>에 담긴 한 장면이다.
인간과 똑같이 생긴 이 외계인이 커피를 버리고 플라스틱을 먹는 모습은 낯설다. 반대로 커피를 마시고 플라스틱을 버리는 장면이었어도 낯설었을까. 영화 <클리어>는 플라스틱 문제를 예술적으로 풀어낸 단편 영화다. 지난 4월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며 "플라스틱 폐기물 문제와 인간성 회복에 질문을 던진다"는 평가를 받았다. 최근 CGV 청담 씨네시티에서 별도 시사회를 열고, 본격 출발을 예고했다.
그린피스와 후지필름 등이 힘을 모아 만든 이 영화는 플라스틱이 주식인 행성을 떠나온 외계인과 플라스틱으로 넘쳐나는 지구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이야기를 담았다. 플라스틱이 부족해 식량난을 겪던 외계인에게 지구는 먹을 게 넘쳐나는 별이다.
영화에서는 '플라스틱'이라는 단어가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플라스틱을 씹어먹는 외계인, 플라스틱 더미 주변 냄새를 맡는 강아지, 편의점 앞에서 플라스틱 컵에 맥주를 따라 마시는 사람들의 모습 등 영화 속 인물들의 삶에는 익숙하게 등장한다. 관객은 영화 속 외계인을 연기한 이주영 배우가 플라스틱 컵과 빨대를 씹어먹는 장면에서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플라스틱이 어딘가 해롭다는 걸 알고 있어서다. 실제 촬영에서 배우가 먹은 컵과 빨대는 식용 가능하게 제작된 소품이다.
플라스틱은 생산부터 폐기까지 온실가스를 배출하고, 자연에서 분해되지 않아 미세플라스틱으로 남고, 생태계와 인간 건강을 위협한다는 이유에서 규제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이어져 왔다. 지난달 환경의 날 행사 주최지인 제주도에서 플뿌리연대는 "플라스틱을 먹이로 착각한 해양생물의 체내에 쌓이고 먹이사슬 형태로 우리 몸속에 축적된 채 건강을 위협한다. 플라스틱은 원료 추출 단계부터 생산, 소비, 폐기되는 생애 전 주기에서 유해화학물질들을 배출하며 대기, 토양, 수계 등 생태계 전반이 오염된다"며 플라스틱 규제 강화를 강조했다.
탈(脫)플라스틱. 어느새 익숙한 말이 됐다. 바다거북 코에 꽂힌 플라스틱 빨대 사진을 오래도록 기억하는 시민들도 있다. 2018년 환경부는 ‘탈(脫)플라스틱 사회’를 목표로 내걸고 매장 내 일회용 컵 사용 규제를 시행했다. 전국 카페에서 매장 내 일회용 컵 사용이 제한됐고, 같은 해 대형마트와 슈퍼마켓에서도 비닐봉지 사용이 금지됐다. 그러나 코로나19 이후 일회용품 사용이 급증하자 일부 지자체는 단속을 중단했고, 규제 완화 요구도 커졌다. 이후 플라스틱 빨대 사용 금지와 일회용컵 규제가 예고됐지만, 사실상 철회되면서 플라스틱 규제는 무기한 유예됐다.
최근 스타벅스 빨대 변화는 상징적이다. 스타벅스는 2018년 플라스틱 빨대 사용을 중단하고, 종이빨대로 전환했지만 올해 다시 플라스틱 빨대로 회귀했다. 각 언론보도에는 "종이빨대 사용 후 불편하다는 소비자 의견과 종이 빨대 생산 과정에서의 탄소 배출 등"이 이유로 언급됐지만, 일회용품 감축 흐름과는 역행한다는 비판도 나왔다. 환경운동연합은 당시 "황당한 결정"이라며 "환경부의 줏대 없는 규제와 종이빨대 유해성에 대한 잘못된 정보 방치가 낳은 결과"라고 지적했다.
플라스틱 문제를 해결하려는 개인의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텀블러를 들고 다니는 사람, 다회용기를 사용하거나 배달음식을 먹지 않는 사람, 샴푸를 쓰지 않고 비누를 쓰는 사람 등 개인이 할 수 있는 행동은 폭넓고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영화 <클리어> 촬영 현장에서는 모두가 텀블러를 사용하고, 배달음식을 먹지 않았다. 심형준 감독은 "보통 촬영 현장은 쓰레기가 많이 나온다"며 "남은 배달음식 쓰레기를 연출부 막내들이 1시간 꼬박 걸려 치우고, 트렁크에 가득 싣고 가다가 산에 던져버리는 경우도 봤다"고 말했다.
푸바오 다큐멘터리 <안녕, 할부지> 제작이 결정적인 계기였다. 그는 "멸종위기종 판다의 서식지 파괴 현실을 알아가면서 환경 보호에 동참할 방법을 고민했다. 이때부터 다같이 일회용품을 쓰지 말자고 약속했다"고 밝혔다.
영화에 출연한 이정민 배우는 "플라스틱 문제를 머리로만 알았는데 영화를 만들면서 더 책임감이 생겼다. 우리가 쓰는 플라스틱 5개에서 3개로, 3개에서 1개로 줄여보자는 마음으로 살아가면 변화가 있을 거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플라스틱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의 회의감은 기업과 정부의 규제가 필요하다고 느끼게 된 계기가 됐다. 그린피스 액티비스트인 조현주 배우는 "개인의 노력으로 줄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더 이상은 정부와 기업의 규제가 필요하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케이팝포플래닛 박진희 캠페이너는 "코로나19 이후 기후위기 심각성을 인지하면서 제로웨이스트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케이팝 산업에서는 제로웨이스트가 안 되고 있는 걸 느꼈다"고 말했다.
좋아하는 가수의 앨범을 살 때마다 포장지를 버리면서 의문을 품게 된 그는 "그냥 안 사야 하는 건가 생각을 하다가 내가 좋아하는 활동인데 왜 스스로 규제를 해야하냐는 의문이 들었고, 기업이 같이 바뀌면 더 효과적일 거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나 혼자 배출하는 탄소보다 기업에서 배출하는 탄소가 더 많아서다.
플라스틱을 먹는 외계인은 영화 속 이야기지만, 매일 플라스틱을 쓰고 버리는 건 우리 일상이다. 이 문제의 무게를 누구에게 맡기고, 누가 책임져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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