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워서 틀면 더 더워지는 에어컨의 역설

  • 김지현 기자
  • 2023.05.18 16:35
(사진 Pixabay)/뉴스펭귄
(사진 Pixabay)/뉴스펭귄

[뉴스펭귄 김지현 기자] 동남아시아와 남부유럽 등 전세계 각지가 극심한 더위에 시달리면서 에어컨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문제는 에어컨이 수많은 사람을 무더위로부터 구하는 동시에 지구를 더 뜨겁게 만든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규제 강화와 기술 혁신을 해법으로 제시하지만, 폭염을 겪고 있는 인구 대부분 비싼 고효율 에어컨을 살 수 있는 구매력이 없어 문제는 더욱 복잡하다.

외신 블룸버그의 17일(이하 현지시간) 보도에 따르면, 전세계 각지가 폭염에 시달리면서 에어컨 구매량이 급증하고 있다. 이미 국제에너지기구(이하 IEA)는 2018년 5월에 발간한 보고서에서 2030년까지 약 10억 대의 에어컨이 판매되고, 2040년에 이르면 에어컨 시장 규모가 두 배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문제는 에어컨 사용이 늘어날수록 지구도 더 더워진다는 것이다. 더워진 지구가 에어컨 수요를 늘리면, 늘어난 에어컨 사용이 다시 지구가열화를 부추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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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컨은 ‘전기 먹는 하마’로 불릴 정도로 많은 전력을 쓴다. 룸에어컨은 선풍기 20~30대, 벽걸이에어컨은 선풍기 10대를 쓰는 것과 같은 양의 전기를 소비한다. 화석연료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국가의 경우, 에어컨 수요가 늘면 화력발전과 같은 화석연료 기반 발전용량으로 전기를 생산해야 하기 때문에 온실가스 배출량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IEA는 2022년 9월 발간한 보고서에서 2021년 한 해 동안 전세계에서 에어컨과 선풍기 등 공간냉각장치로 쓴 전기소비량이 2000테라와트시에 달해, 건물부문 총 전기소비량의 약 16%를 차지했다고 밝혔다. 이는 2021년 아프리카 전체 전기사용량의 2.5배에 해당하는 수치다.

2000년부터 2021년까지 지역별 공간냉각장치를 통한 전력 소비량과 가동 중인 에어컨의 숫자를 나타낸 표. 빨강색이 아시아태평양 지역, 주황색이 유라시아 지역, 노란색이 중동 지역, 청록색이 아프리카 지역, 연두색이 유럽 지역, 남색이 중앙 및 남아메리카 지역, 하늘색이 북아메리카 지역을 나타낸다. 회색 점은 에어컨 숫자를 나타낸다. (사진 IEA 공식홈페이지)/뉴스펭귄
2000년부터 2021년까지 지역별 공간냉각장치를 통한 전력 소비량과 가동 중인 에어컨의 숫자를 나타낸 표. 빨강색이 아시아태평양 지역, 주황색이 유라시아 지역, 노란색이 중동 지역, 청록색이 아프리카 지역, 연두색이 유럽 지역, 남색이 중앙 및 남아메리카 지역, 하늘색이 북아메리카 지역을 나타낸다. 회색 점은 에어컨 숫자를 나타낸다. (사진 IEA 공식홈페이지)/뉴스펭귄

더 큰 문제는 에어컨에 쓰이는 냉매다. 에어컨은 냉매라 불리는 액체가스가 기화하면서 주변의 열을 빼앗아가는 원리로 공기를 차갑게 만든다. 그런데 현재 가장 일반적인 냉매인 수소불화탄소(HFC)는 이산화탄소보다 수백 배에서 수천 배 강한 온실효과를 발휘한다. 요즘 한국 가정의 룸에어컨에 흔히 쓰이는 HFC 계열 냉매(R410A)는 이산화탄소보다 온실효과가 무려 1924배 높다.

과학자들은 HFC 사용을 극적으로 줄이지 않으면 지구가열화가 가속화돼 더 치명적인 더위를 유발할 것이라고 경고해 왔다. 이에 2016년 제28차 몬트리올 의정서 당사국 총회에서 170여 개 국가가 HFC 냉매 생산 및 소비를 2047년까지 80% 이상 줄이기로 합의했다. 미국과 유럽연합 국가 대부분이 2019년부터 단계적인 HFC 사용 감축에 들어갔고, 한국은 지난 4월 19일부터 HFC를 온실가스 감축 규제 물질에 포함해 2024년부터 감축을 시작할 예정이다.

2016년 제28차 몬트리올 의정서 당사국 총회. (사진 EPA 공식홈페이지)/뉴스펭귄
2016년 제28차 몬트리올 의정서 당사국 총회. (사진 EPA 공식홈페이지)/뉴스펭귄

전문가들은 규제강화와 기술혁신을 에어컨 문제의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에너지 효율성이 높은 에어컨만 시장에서 판매될 수 있도록 규제를 강화하고 온실효과가 적은 냉매를 개발하자는 것이다. IEA는 2022년 9월 발간한 보고서에서 “지구 평균 온도 상승폭을 산업화 이전 대비 1.5℃ 이내로 억제하려면, 에어컨의 에너지 효율을 2배로 늘리고 엄격한 인증표시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밝혔다.  

문제는 인도,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극심한 더위로 고통받고 있는 저소득 국가에서 에어컨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블룸버그는 17일 보도에서, 이들 국가의 전문가들은 “에어컨에 대한 규제를 강화할 경우, 저소득층이 에어컨을 구매하기 어려워져 많은 인구가 생명의 위협을 받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에너지 효율을 높이고 새로운 냉매를 쓴 에어컨은 가격도 비싸기 때문에 저소득층이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국제 연구기관 모두를 위한 지속가능한 에너지(Sustainable Energy for All)가 2022년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전세계 12억 명의 인구가 에어컨을 사지 못해 더위를 그냥 견디고 있으며, 24억 명이 에너지 효율이 높은 에어컨보다는 저렴한 에어컨을 구매한 것으로 나타났다.

2018년 기준 국가별 에어컨 보유 가구 비율. 아프리카 사하라 이남 지역 가구 중 약 5%만 에어컨을 가지고 있으며, 인도와 인도네시아는 약 10%, 멕시코와 브라질은 약 30% 정도만 에어컨을 갖고 있다. 반면 일본, 미국, 한국은 85% 이상의 가구가 에어컨을 보유하고 있다. (사진 IEA 공식홈페이지)/뉴스펭귄
2018년 기준 국가별 에어컨 보유 가구 비율. 아프리카 사하라 이남 지역 가구 중 약 5%만 에어컨을 가지고 있으며, 인도와 인도네시아는 약 10%, 멕시코와 브라질은 약 30% 정도만 에어컨을 갖고 있다. 반면 일본, 미국, 한국은 85% 이상의 가구가 에어컨을 보유하고 있다. (사진 IEA 공식홈페이지)/뉴스펭귄

더운 지역에 거주하는 저소득층에게 에어컨의 에너지 효율은 부차적인 문제일 수밖에 없다. 이들에겐 에어컨에 접근하는 것이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외신 블룸버그는 17일 보도에서 다음과 같은 사례를 전했다.

인도 뉴델리에서 청소노동자로 일하는 피유 할다르(Piyu Haldar)의 집은 여름이면 철판 지붕 위에서 빵을 구울 수 있을 정도로 뜨거워졌다. 할다르 부부는 잠에 들기 전에 침대에 물을 뿌려 방을 시원하게 만들곤 했다.

할다르가 에어컨을 사기로 결심한 것은 2016년에 갓 태어난 아이가 열사병을 앓았을 때다. 할다르는 식사를 줄이고, 청소하는 집의 수를 두 배로 늘리고, 대출을 받아 저렴한 에어컨을 구매했다. 할다르는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밤에만 에어컨을 키는데도 삶에 더 많은 활력을 갖게 됐다. 이웃들은 우리가 에어컨을 샀다고 잘 살게 된 줄 안다”고 말했다.

미국 럿거스대학교 공중보건학과 교수 호세 길레르모 로렌트(José Guillermo Laurent)는 블룸버그와 인터뷰에서 "이 같은 상황에서 에어컨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자는 것은 저소득 국가에게 너무 엄격한 조건을 부과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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