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피셜 지오그래픽] ⑤ "아름다운 것들은 관심을 바라지 않아" 클류쳅스카야_두 번째

  • 남준식 객원기자
  • 2020.11.06 07:00

 

[내’피셜 지오그래픽]은 한 대학생 지리학도가 10개 나라를 ‘탐험’한 기록이다. 이런 류의 기록에서 일반적으로 쓰이는 ‘배낭여행’이라는 단어 대신 탐험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찾아간 곳들의 지구생태적 가치가 우선은 크기 때문이다. 더불어 지구의 살갗 아래까지 날 것 그대로 바라 본 시선이 단순한 여행의 차원을 넘은 까닭이다. 세상을 자기 희망대로 단순화하지 않았을 때야 비로소 그전까지 보이지 않던 문제들이 보이기 시작한다(김영민, 공부란 무엇인가 중에서). 이 연재물이 가치를 갖는 것은, 젊은 지리학도가 170일간의 탐방을 통해 새로운 것들, 현상들, 문제들을 발견했다는데 있다. 이런 연유로, 연재물의 타이틀 [내’피셜 지오그래픽]은 ‘내가 쓴 특별한(스페셜)’, ‘내가 생각을 교정하여 정의한(나의 뇌피셜)’ 등의 중첩된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연재물은 모두 10회에 걸쳐 독자들과 만난다. [편집자]

 

지도가 중요한 이유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위치), 어디로 가야 하는지(방향)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에서 지리학을 전공한 것이 내 삶의 지도로 작용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사진 남준식) / 뉴스펭귄

베이스캠프에서 마을로 내려가는 하산길은 고난의 행군이었다. 30~40kg씩 짐을 이고 나흘간 내려왔다. 1시간 걷고 10분 쉬기를 반복하며 하루 9시간씩 주구장창 걸었다. 클류쳅스카야가 토해낸 화산찌꺼기 틈으로 빙하가 녹아서 생긴 융빙수가 간헐적 계곡을 이루고 있었고, 무질서하게 박혀있는 자동차만한 바위들의 위치에너지는 최대치에 도달하여 당장에 눈앞에서 굴러떨어져도 이상할 것 없는 상황이었다. 발이 푹푹 빠지는 그 험준한 언덕을 내려갔다 올라가기를 수십 번 반복, 허리와 골반 어느 하나 녹슬지 않은 곳이 없었다.       

산 위에선 살고 싶었고, 하산할 땐 죽고 싶었다 (사진 남준식) / 뉴스펭귄
표정만 봐도 얼마나 힘든지 알 수 있다. 체격이 거의 효도르인데도 말이다 (사진 남준식) / 뉴스펭귄
빙하 녹은 물에 탁족 (사진 남준식) / 뉴스펭귄
난 처음에 왠 새우젓 같은 게 날아다니나 했다. 근데 그냥 그만큼 통통하게 살이 오른 모기였다 (사진 남준식) / 뉴스펭귄
모기 스프레이로 made in Russia만한 게 없다. 마트료시카보다 실용적인 선물 (사진 남준식) / 뉴스펭귄
저 멀리 보이는 톨바칙 화산(Tolbachik, 3682m)을 이정표 삼아 걷고 또 걷는다 (사진 남준식) / 뉴스펭귄
우유를 흩뿌린 듯한 톨바칙 화산의 트와일라잇. 우린 이것을 핑크 오로라라고 불렀다 (사진 남준식) / 뉴스펭귄
두 화산을 닮은 텐트 (사진 남준식) / 뉴스펭귄
뚝딱 만든 밥상이 이케아 부럽지 않다 (사진 남준식) / 뉴스펭귄
비록 이런 것들로 허기를 채웠지만.. 결핍과 낭만은 붙어다닐 때가 많지 않은가! (사진 남준식) / 뉴스펭귄
"로만, 아무래도 텐트를 옮기는 게 좋겠어" / "괜찮아, 우린 5명이니까" (사진 남준식) / 뉴스펭귄
물 뜨러 가는 길 (사진 남준식) / 뉴스펭귄

정상을 밟고 소기의 뜻을 달성한 팀원들은 한층 여유로워 보였다. 침낭에 몸의 절반만 집어넣고 옹기종기 앉아서 아이패드에 담아온 무언가를 재미나게 보는 저 틈에 나도 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나로서는 한 마디도 거들 수 없는 러시아어가 그들에겐 소비에트 시절의 향수라도 되는 듯, 너무나 돈독해 보이는 그 모습이 내게는 되려 더이상 가까워질 수 없는 거리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럴 땐 설탕을 진탕 넣은 레몬티만 하염없이 홀짝였다.

하도 우려내어 조직이 풀어진 레몬 쪼가리를 질겅질겅 씹고 있는데, 로만이 나를 부르더니 스틱 하나와 카메라만 챙겨서 따라오라고 한다. 어딘지도 모를 비탈길을 30분 정도 올랐을까, 도저히 현실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꿈에선 꼭 이런 절정의 순간에 잠에서 깨더란 말이지. 의식을 가다듬고 복식으로 소리를 뱉어보니 다행히 꿈은 아니다. 신이 장난치다가 깜박하고 그냥 가버린 것만 같달까, 땅은 접힌 카펫처럼 울어 있었고, 벨벳보다 고운 이끼가 햇살에 붉게 물들고 있었다. 

뉴스펭귄 기자들은 기후위기와 그로 인한 멸종위기를 막기 위해 헌신하고 있습니다.
정기후원으로 뉴스펭귄 기자들에게 힘을 실어 주세요. 이 기사 후원하기

소쉬르라는 철학자가 말하기를 인간은 언어로 대상을 인식한다는데, 대체 이 '말도 안되는' 광경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펜을 칼처럼 휘두르는 김훈이라면 가능할련가, 그 옛날 연암이 요동벌판을 지나며 한바탕 통곡하고 싶다한 심정이 이러한 걸까, 러시아 태생의 천재 화가 마르크 샤갈이라면 혹시 모르지. 그래, 그러고 보니 샤갈의 작품 같다. 이 아득한 날 것의 대지 앞에 언어는 무용지물일 뿐. 

손에 쥔 모래가 빠져나가듯 눈에 아무리 담아보아도 자꾸 어디론가 새어나가는 느낌이 꼭 깨어나는 순간의 꿈과 같았다. 로만이 힙플라스크에 담긴 술을 건네주기 전까진. 보드카는 아니지만 할머니가 담궈준 러시아 전통 증류주라며, 유일하게 정상을 밟지 못한 나의 아쉬움을 달래주려고 일부러 이곳까지 길을 돌아왔다는 말을 전해주었다. 한 모금 꼴깍이고 코로 크게 숨을 들이켰다. 이때만큼은 한껏 취하고 싶었기에..

코끝서부터 눈동자와 머리를 차례로 지나 가슴을 뜨겁게 데우는 그 맛은 설명할 수 없다. 다만 기억될 뿐이다. 

"이젠 아름다움이 뭔지 알 것 같아. 그건 아름답다는 말로는 부족한 것을 마주할 때 느끼는 감정이야" (사진 남준식) / 뉴스펭귄
생각에 잠겨 있는 로만 (사진 남준식) / 뉴스펭귄
러시아의 위대한 화가, 샤갈의 작품을 보는 것 같다 (사진 남준식) / 뉴스펭귄

 

-끝-

 

 

뉴스펭귄은 기후위험에 맞서 정의로운 해결책을 모색하는데 초점을 맞춘 국내 유일의 기후뉴스입니다. 젊고 패기 넘치는 기후저널리스트들이 기후위기, 지구가열화, 멸종의 위험성을 알리기 위해 분투하고 있으며, 그 공로로 다수의 언론상을 수상했습니다.

뉴스펭귄은 억만장자 소유주가 없습니다. 상업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일체의 간섭이 없기 때문에 어떠한 금전적 이익이나 정치적 이해관계가 우리의 뉴스에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뉴스펭귄이 지속가능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의 지원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여러분의 후원을 밑거름으로, 게으르고 미적대는 정치권에 압력을 가하고 기업체들이 기후노력에 투자를 확대하도록 자극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적은 금액이라도 여러분의 소중한 후원은 기후위험으로부터 우리를 지키는데 크게 쓰입니다.

뉴스펭귄을 후원해 주세요. 후원신청에는 1분도 걸리지 않으며 기후솔루션 독립언론이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도록 만듭니다.

감사합니다.

후원하러 가기
저작권자 © 뉴스펭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