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피셜 지오그래픽] ② 지구의 나이테 200미터 모허절벽에서 공생(共生)을 만나다

  • 남준식 객원기자
  • 2020.10.14 07:50

 

내’피셜 지오그래픽]은 한 대학생 지리학도가 10개 나라를 ‘탐험’한 기록이다. 이런 류의 기록에서 일반적으로 쓰이는 ‘배낭여행’이라는 단어 대신 탐험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찾아간 곳들의 지구생태적 가치가 우선은 크기 때문이다. 더불어 지구의 살갗 아래까지 날 것 그대로 바라 본 시선이 단순한 여행의 차원을 넘은 까닭이다. 세상을 자기 희망대로 단순화하지 않았을 때야 비로소 그전까지 보이지 않던 문제들이 보이기 시작한다(김영민, 공부란 무엇인가 중에서). 이 연재물이 가치를 갖는 것은, 젊은 지리학도가 170일간의 탐방을 통해 새로운 것들, 현상들, 문제들을 발견했다는데 있다. 이런 연유로, 연재물의 타이틀 [내’피셜 지오그래픽]은 ‘내가 쓴 특별한(스페셜)’, ‘내가 생각을 교정하여 정의한(나의 뇌피셜)’ 등의 중첩된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연재물은 모두 10회에 걸쳐 독자들과 만난다. [편집자]

 

버스요금이 상당했던 걸로 기억한다. 어느 정도였나면, 지금까지 영수증을 보관하고 있을 정도. (사진 남준식)/뉴스펭귄 

작은 마을들에 경유하는 족족 차창 밖으로 소녀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줄지어 아우성이었다. 그중에서도 적발의 머리칼에 유독 눈길이 가는 것은 내겐 낯선 스펙트럼이었던 탓일까. 클레멘타인이 물들인 부담스러운 빨간색이 아니라 금발과 흑발 속에 옅게 감도는 느낌이었고 달처럼 하얀 피부 위에 주근깨가 매력을 더했다. 이것은 아이리쉬의 유전이다. 캐나다로 이주한 앤의 머리가 빨간머리였던 것은 그의 몸 속에 이쪽의 피가 흐르기 때문이었겠지.

앞자리에 앉은 사람에게 물어보니 '에드 시런' 콘서트를 예매하려고 전날부터 줄 서 있는 것이라고 한다. 빌보드를 석권 중인 세계적인 팝 스타라는 말을 덧붙였다. 새로 나온 앨범트랙을 살펴보니 마침 내가 지금 가고 있는 도시의 이름이 들어간 '골웨이 걸(Galway girl)'이라는 곡이 있길래 재생버튼을 눌러봤으나 내 스타일이 아니어서 도로 껐다. 대신 데미안 라이스(Damien Rice)와 유투(U2)의 음악을 틀었다. 버스의 와이파이가 자꾸 끊기는 통에 조금씩 되감아 듣는 기분이란 고통스러우면서도 야릇한 재미가 있었다.

맥도날드 말고 맥도나에서 요기를 했다. '맥(Mc/Mac)'으로 시작하는 성은 아이리쉬나 스코티쉬 혈통이다. (사진 남준식)/뉴스펭귄
아일랜드답게 포슬포슬한 감자의 맛은 좋았다. 김치가 그리웠다. (사진 남준식)/뉴스펭귄

나는 모허절벽을 보기 위해 골웨이(Galway)에 가는 중이었다. 아일랜드 전역을 연결해 주는 에이레안 버스를 타고서. 에이레(Eire)는 아일랜드의 옛날 이름이다. 아일랜드의 지도를 보면 지난한 역사만큼이나 땅의 생김새 또한 우리나라와 상당히 닮아 있어 정감이 가는데, 대서양에 면한 서부의 골웨이는 동부의 더블린, 남부의 코크(Cork)와 더불어 아일랜드의 3대 도시를 이루고 있다. 골웨이에는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굴까기 대회가 있을 정도로 굴이 유명하니, 굴 매니아라면 필수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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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짧은 경험으로 미루어보건대 모허절벽은 아일랜드를 통틀어서 과연 '두 번째 자랑'이라 할 만 했다(첫 번째는 기네스). 그리고 'Embrace the Wild Atlantic Way of Life'라는 아일랜드 관광청의 캐치프레이즈에 딱 들어맞는 곳이었다. '와일드 아틀란틱 웨이(Wild Atlantic Way)'란 남부 코크부터 북부 도니갈까지 이어지는 2500km 해안 도로인데, 여기서 드라이브를 하면 누구나 한 편의 뮤직비디오 속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한다. 나는 절벽을 따라 트래킹을 하고 싶었기 때문에 더블린에서 출발하는 투어버스를 이용하지 않고 골웨이와 두린(Doolin)을 거쳐 혼자서 갔다. 내 생각, 방식대로.

모허절벽 입구 (사진 남준식)/뉴스펭귄
추모하는 방식에서조차 그 나라의 국민성이 묻어나는 듯 하다. (사진 남준식)/뉴스펭귄

절벽을 따라 걷는데 자칫 실족사로 이어질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도 울타리 하나 없다. 자연경관을 해치지 않기 위함이다. 우리나라 같으면 어떻게 했을까. 2m 간격으로 펜스를 설치하고 호밀밭의 파수꾼을 자처하며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국민들을 걱정해주겠지. 그러나 여기는 그렇지 않다. 철저한 자유와 방임이다. 

나는 날씨만큼이나 쿨한 이 나라의 마인드가 마음에 들었다. 우리는 흔히 서양은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여기고 동양은 자연과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미안한 말이지만 자연을 망가뜨리는 쪽은 우리쪽이다. 경관의 통일을 고려하지 않는 지역개발, 명승지로 이름만 나면 때려짓는 구름다리며 케이블카, 아름다운 산자락과 강변의 미관을 해치는 궁전모텔과 백숙집과 매운탕집이 머릿속에 스치고는 내 앞의 모허절벽에 집중하기로 했다. 

아일랜드의 국화는 클로버! 행운을 가져다 준다는 네잎 클로버를 좀 찾아보려고 했는데 끝내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사진 남준식)/뉴스펭귄
200m 거대한 퇴적암의 수평한 줄무늬에서 지구의 생애를 엿볼 수 있다. 퇴적암은 고마운 암석이다. (사진 남준식)/뉴스펭귄

유럽의 북서해안에 절벽이 발달할 이유는 폭풍 때문이다. 프랑스 노르망디의 에트르타 절벽, 영국 서식스의 세븐 시스터즈, 덴마크의 페로 제도 등 세계에서 내로라 하는 해안절벽들이 모두 한데 분포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런 곳의 날씨 궂은 날 파도의 높이는 10m에 이른다. 폭풍이 불어닥치는 이유는 차가운 북극의 기단과 따뜻한 북대서양 해류가 만나면서 대기의 환경이 불안정해지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폭풍의 언덕(Wuthering Heights, 에밀리 브론테 저)이라는 제목이 괜히 탄생한 게 아닌 듯 싶다.  

태평양은 말 그대로 태평한 바다이지만, 대서양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오죽하면 사람들이 대서양을 지나 마주 한 바다를 두고 태평양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비글호를 타고, 타이타닉호를 타고 이 대서양을 건너야 했던 이유를 헤아려본다. 배는 항구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지만 그것이 배의 존재의 이유는 아니라는 말이 떠올랐다. 어쩌면 지금의 나도 마찬가지인지 모르지.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 그 두려움에서 오는 설렘이 나를 늘 새로운 곳으로 인도하니까.

모허절벽에 부딪히는 파도소리가 한동안 귓가에 맴돌았다.

자연이 어쩌면 이리 서사적일 수 있을까! (사진 남준식)/뉴스펭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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