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펭귄수첩] 설국 울릉도에 웬 고릴라가 떡하니

  • 남주원 기자
  • 2024.02.13 16:43
울릉도에서 묵은 숙소. (사진 남주원 기자)/뉴스펭귄
울릉도에서 묵은 숙소. (사진 남주원 기자)/뉴스펭귄

[뉴스펭귄 남주원 기자] 이번 설 연휴에 2박 3일로 울릉도를 다녀왔다. 평소에는 가기 어려울 것 같아 명절을 껴서 나름 큰마음 먹고 떠난 여행이었다. 서울에서 포항까지 간 후 배를 타고 울릉도에 입도했다.

첫째 날 묵은 숙소는 '스테이너와'라는 프라이빗 독채였다. 'Stay(머물다)'와 'With you(너와, 당신과 함께)'를 합쳐서 지은 이름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서야 '너와'가 그 뜻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울릉도 전통방식으로 지어진 민가를 '너와집'이라고 한다. 너와집은 거센 바람과 눈이 특징인 울릉도에서 구하기 쉬운 옥수수대나 판재, 억새 등 우데기로 외벽을 만든 집이다. 이 때문에 우데기집으로 불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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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에서 묵은 숙소. (사진 남주원 기자)/뉴스펭귄
울릉도에서 묵은 숙소. (사진 남주원 기자)/뉴스펭귄

내가 머문 곳은 전통 너와집을 현대식으로 재해석해 지어진 숙소였다. 여러 선택지가 있었지만 고민 끝에 이곳에서 하룻밤을 머물기로 결정을 굳힌 이유는 통창 너머 울릉도 바다가 펼쳐지는 아름다운 뷰, 그리고 객실 이름 때문이었다. 

'섬기린초', '섬노루귀', '울릉국화', '우산제비꽃', '섬초롱꽃'... 울릉도 고유 자생식물 이름을 딴 각각의 객실명이 내 눈길과 마음을 사로잡았다. 12개에 이르는 어여쁜 방들 중에서 나는 울릉국화를 택했다.

울릉국화는 울릉도 나리분지에서 자라는 천연기념물이다. 찾아보니 한때 멸종위기에 처할 지경이었으나 나리분지 일부 모서리에서 보호하면서 간신히 연명하고 있다고 한다.

나리분지 설경. (사진 남주원 기자)/뉴스펭귄
나리분지 설경. (사진 남주원 기자)/뉴스펭귄

자연과 어우러진 조용한 독채에서 온전한 휴식을 취하고 다음날 나리분지로 향했다. 새하얀 눈이 뒤덮인 나리분지는 마치 다른 세상 같았다. 울릉도는 눈이 많이 내린다더니, 나리분지의 설경을 보니 외마디 감탄이 절로 나왔다.

나리분지는 울릉도에서 유일하게 평지를 이룬다. 과거 화산 중앙부가 함몰해 만들어진 지형에 물이 고여 호수가 됐고, 이후 호수가 주변 퇴적물로 채워지고 물이 빠지면서 지금과 같은 편평한 땅이 됐다.

"어라 근데 저게 뭐지?!" 나리분지 한가운데 있는 거대한 고릴라 모형이 멀리서도 시선을 집중시켰다. 귀여운 초대형 고릴라 정체는 '울라(Ulla)'였다. '울릉도 고릴라'라는 뜻으로 울릉도를 상징하는 마스코트다. 

나리분지에 있는 초대형 고릴라 벌룬. (사진 남주원 기자)/뉴스펭귄
나리분지에 있는 초대형 고릴라 벌룬. (사진 남주원 기자)/뉴스펭귄

울릉도 관광명소와 포토존 곳곳에서는 울라를 볼 수 있다. SNS만 봐도 울릉도에서 울라와 함께 찍은 인증샷을 올리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하지만 난 지독한 의문이 들었다. 울릉도에는 고릴라가 살지 않는데 왜 고릴라가 울릉도 대표 캐릭터가 됐을까.

"나 너무 꼰대인가? 아니면 직업병인가... 울릉도에 서식하는 고유동물이 고릴라도 아닌데 왜 고릴라를 저렇게 내세웠을까? 울릉도에서만 볼 수 있는 자생동식물을 마스코트로 하면 좋을 텐데. 독도강치(지금은 멸종했으나 과거 독도에 살던 바다사자)처럼 멸종위기를 알릴 수 있는 동식물을 해도 좋고..."  

못내 아쉬워하는 소리가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귀여운 울라를 앞에 두고 함께 여행 온 친구에게 투덜거렸다. 친구는 늘 뉴스펭귄 홈페이지에서 나의 기사를 정독하고 정성 어린 댓글을 달아주는 사람이다. 그는 내가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며 동조했다.

당시에는 그냥 넘어갔지만 서울로 돌아와 열심히 웹서핑을 했다. 울라는 우산국 시절부터 500년 이상 울릉도를 지켜온 '송곳산의 수호신'이라는 콘셉트로 탄생했다. 울릉도 송곳산 가운데 튀어나온 부분이 고릴라처럼 보여서 그렇다고 한다. 

송곳산은 수직 암벽 봉우리가 마치 송곳을 세워놓은 것처럼 뾰족하게 생긴 산이다. 비록 나는 안 갔지만 '카페 울라'에서는 송곳산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실 수 있다. 울릉도를 방문한 사람들이 꼭 들리는 핫플레이스로, 거대한 울라 동상이 세워져 있고 다양한 울라 굿즈를 판매한다.

울릉국화. (사진 국립생물자원관)/뉴스펭귄
울릉도달팽이. (사진 국립생물자원관)/뉴스펭귄
울릉도달팽이. (사진 국립생물자원관)/뉴스펭귄

외딴섬 울릉도의 구석구석을 알리려는 울라의 탄생배경이 이해 가면서도 여전히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다. 울릉국화나 환경부 멸종위기 야생생물 2급인 울릉도달팽이 또는 울릉도 바다에 사는 멸종위기종 해마 등 실제로 울릉도를 터전 삼아 살아가는 동식물을 마스코트로 만들었으면 어땠을까.

아프리카 열대우림에 사는 고릴라보다 울릉도에서 나고 자라는 우리 고유종을 잘 아는 국민이 과연 몇이나 될까. 울라가 남녀노소 불문하고 관광객들의 애정을 듬뿍 받듯이, 우리의 자생식물과 동물을 더욱 알리고 보호하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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