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탐사] 해방촌 108계단, 오늘도 새들이 부딪쳐 죽는데…

  • 이수연 기자
  • 2023.04.05 14:51

올해 3월 조류충돌방지 스티커 설치 약속한 용산구,
현장 가보니 스티커 대신 선명한 흔적만

지난해 10월 해방촌 108계단 상부 승강기 유리벽에 충돌한 것으로 보이는 노랑턱멧새 (사진 독자 제공)/뉴스펭귄
지난해 10월 해방촌 108계단 상부 승강기 유리벽에 충돌한 것으로 보이는 노랑턱멧새 (사진 독자 제공)/뉴스펭귄

[뉴스펭귄 이수연 기자] "여기 108계단 앞에 새가 떨어졌는데 유리벽에 부딪친 것 같아요."

서울 용산구 해방촌 108계단 인근에 거주하는 직장인 A씨(34)는 지난해 10월 31일 출근길에 108계단 앞에서 죽어가는 새를 목격했다. 108계단 승강기 유리벽에 부딪쳐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것으로 추정됐다.

그는 급히 새를 구조해 작은 상자로 옮겼으나 20분 뒤 폐사했다. 평소 <뉴스펭귄> 애독자였던 A씨는 "깃털이 깨끗하고 외상 하나 없었는데 숨을 가쁘게 쉬면서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모습이 이상했다. 승강기 유리벽을 관찰하는데 문득 예전에 뉴스펭귄에서 다뤘던 조류충돌 기사가 떠올라 '저기 부딪쳤구나' 확신했다"고 제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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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독자 제공)/뉴스펭귄
(사진 독자 제공)/뉴스펭귄

A씨는 제보에 앞서 용산구청에 민원을 제기했다. 이 승강기는 용산구청이 관리하는 시설이기 때문이다. 그는 용산구청 민원 게시판에 글을 올려 "도심 건물 유리 등에 새들이 죽는 일이 심각한데 용산구청에서 늦지 않게 조치해주면 좋겠다"며 "5㎝ 간격의 점 모양 스티커가 심미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효과도 좋은 것 같다"고 제안했다.

한 달 뒤 용산구청 도로과 관계자는 "현장조사 결과 엘리베이터 투명유리벽에 조류충돌 사고가 발생하고 있어 조류충돌 방지스티커를 설치해 동일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답변했다.

이후 A씨가 이 관계자에게 '언제쯤 설치할 예정인지' 전화로 묻자 "요청하신 사안은 간단한 작업으로 보이는데 지금은 연말이라 작업을 다 정리하는 중이다. 2023년 첫 작업은 3월 말부터 시작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사진 독자 제공)/뉴스펭귄
(사진 독자 제공)/뉴스펭귄

4월 찾아간 후암동 108계단엔
충돌방지 스티커 대신 선명한 자국만

2023년 4월에 접어든 지금, 약속한 조치가 취해졌을까. <뉴스펭귄>이 지난 4일 해방촌 108계단을 방문해 현장을 확인한 결과, 승강기 상부 유리벽에 조류충돌 방지스티커는 없었고 대신 새가 부딪친 흔적이 약 5개 보였다.

현장에 동행한 김윤전 국립생태원 연구원은 "현재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국은 5개"라며 "하늘이 바로 보이는 구도이기 때문에 새가 날기 좋게 생겼다"고 분석했다.

유리벽 4칸 중 새가 충돌한 흔적은 왼쪽 상단 1개, 왼쪽 하단 1개, 오른쪽 상단 3개로 확인됐다. 오른쪽 상단 1개를 제외한 4개는 위에서 아래 방향으로 부딪친 자국이었다.

유리벽에 새가 부딪힌 자국 5개 (사진 이수연 기자)/뉴스펭귄
육안으로 보이는 조류충돌 흔적 5개 (사진 이수연 기자)/뉴스펭귄

"이런 구조물에도 새는 죽는다"

김윤전 연구원은 "건물 유리창이나 방음벽이 아닌 경우엔 기타로 분류하는데, 한마디로 이런 기타 구조물에도 새는 죽는다"며 "보통 충돌 흔적이 선명하게 남는 종이 드물고 주로 비둘기류가 흔적이 잘 남는다"며 충돌한 새가 멧비둘기나 집비둘기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짐작했다.

그는 "비둘기까지 신경써야 하느냐고 할 수도 있지만 불특정 새들이 유리벽에 부딪혀 죽는 현실까지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선명한 조류충돌 자국 (사진 이수연 기자)/뉴스펭귄
설명하는 김윤전 국립생태원 연구원 (사진 이수연 기자)/뉴스펭귄

신경 못 썼다는 용산구청,
"다시 작업 진행하겠다"

승강장 상부에서 위쪽으로 조금 이동해 아래를 내려다보면 계단은 보이지 않고 승강장 너머로 탁 트인 하늘만 보인다. 유리벽 뒤로 건물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새의 시야에선 충분히 착각하고 날아갈 수 있는 구도였다.

<뉴스펭귄>은 108계단 현장에서 찍은 조류충돌 사진을 용산구청 도로과 관계자에게 보냈다. 이에 용산구청 관계자는 "올해 3월 설치를 계획 중이었으나 내부 인사이동으로 신규 담당자가 많아지면서 신경쓰지 못한 건 사실"이라면서 "사진으로 직접 확인하면서 부서에서도 스티커 붙이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절차 따라 작업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새 시야에서 유리벽 너머는 공중이다 (사진 이수연 기자)/뉴스펭귄
108계단 승강기 투명 유리벽 뒤로 보이는 하늘 (사진 이수연 기자)/뉴스펭귄

서울에서 5년간 2300건 부딪히는데
조류충돌방지 예산 없다는 서울시

조류충돌 문제가 특히 심각한 곳은 도시다. 고층건물이 밀집한 도시에서는 하늘을 비행하는 새들이 투명한 유리창에 부딪쳐 떨어지는 사고가 잦기 때문이다.

자연관찰 플랫폼 네이처링에 시민들이 기록한 '야생조류 유리창 충돌 기록'에 따르면 2019년부터 서울에서 투명 유리창에 부딪친 새는 약 2252마리였다. 그중 건물이 827건, 방음벽 825건, 기타 580건이었다. 조류충돌 방지필름 등 저감조치가 없는 곳은 2227건에 달했다.

서울 중구 한 유리창에 새가 부딪힌 흔적 (사진 네이처링-김윤전)/뉴스펭귄
서울 중구 한 유리창에 새가 부딪힌 흔적 (사진 네이처링-김윤전)/뉴스펭귄

오는 6월부터 시행되는 '야생생물 보호 및 관리에 관한 법률' 개정안에 따라 국가기관은 야생동물이 투명 유리창, 방음벽 등 인공구조물에 충돌하거나 추락해 폐사하는 피해를 최소화하도록 인공구조물을 설치· 관리해야 한다. 그러나 서울시는 예산조차 마련하지 않은 상황이다.

서울시청 관계자는 <뉴스펭귄>과 통화에서 "현재 시점으로 조류충돌방지 관련 예산은 없다"면서 "어떤 방식으로 할지 계속 고민 중이고, 방향을 설정하면 추가로 예산 확보해 사업 추진할 의지는 있다"고 말했다.

서울시는 사업 예산은 없지만 조례는 마련했다고 밝혔다. 지난해 10월 만든 '서울특별시 야생생물 보호 및 관리에 관한 조례'에는 인공구조물로 인한 야생동물의 피해방지 내용도 담겼다. 

한편, 환경부는 '야생생물 보호 및 관리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 일부개정령안에 대한 의견을 이달 19일까지 받는다.

우리나라 야생조류 충돌 지점 (사진 네이처링 갈무리)/뉴스펭귄
우리나라 야생조류 충돌 지점 (사진 네이처링 갈무리)/뉴스펭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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