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탄소 안 하면 수출 막힌다"...철강벨트 주민 65% '전환 필요'
철강벨트 지역 주민 10명 중 7명이 철강산업 위기를 체감하고 있다. 일자리가 줄고 상권이 침체하면서 포항 주민 80%는 실제 피해를 경험했다고 답했다. 지역민들은 탈탄소 전환만이 살길이라고 입을 모았다. 내년 EU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시행으로 저탄소 철강이 아니면 수출길이 막힐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 정부 지원은 독일의 1/90, 중국의 1/140 수준에 불과하다. 중국이 공격적 투자로 시장을 선점하는 동안 한국은 뒤처지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미 위기 느낀다…포항 주민 80% "지역경제 타격 받았다"
철강산업이 지역경제의 버팀목인 포항, 광양, 당진, 순천 등 이른바 '철강벨트' 지역에서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한국리서치가 기후솔루션 의뢰로 이들 지역 주민 2000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25 철강 산업 탈탄소 인식조사' 결과, 응답자의 65.3%가 "철강산업이 현재 위기 상황"이라고 답했다. 특히 포스코 본사가 있는 포항 지역은 75%가 철강산업의 위기를 체감했다. '심각한 위기'라고 느끼는 비율은 27.1%로 타 지역의 두 배 수준이었다.
위기감은 단순한 불안감이 아니라 실제 경험에서 비롯됐다. 제철소 지역 주민의 64.9%는 '철강산업 위기로 지역 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겪었다'고 답했다. 포항에선 같은 응답 비율이 80%에 달했다. 철강산업 의존도가 가장 높은 포항 지역이 가장 먼저, 가장 크게 타격을 받고 있는 셈이다.
구체적인 피해 양상도 드러났다. 지역민들은 '지역 내 일자리 축소 및 신규 고용 감소'(77.3%)와 '지역 소상공인 매출 감소 및 폐업 증가'(66.5%)를 가장 큰 어려움으로 꼽았다. 제철소가 침체하자 관련 일자리가 줄고, 이는 곧바로 지역 상권 위축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주민들은 앞으로의 전망도 밝다고 보지 않았다. 지역민들은 철강산업이 향후 지역경제에 미칠 긍정적 영향이 68.4%로, 과거 영향력(79.4%)보다 11%p 감소할 것으로 내다봤다. 철강산업이 지역경제를 떠받쳐온 힘을 점차 잃어가고 있다는 인식이 지역 전반에 퍼져 있는 것이다.
"탈탄소 안 하면 수출 막힌다"…CBAM 시행 목전
지역민들이 체감하는 위기의 배경에는 철강산업을 둘러싼 대내외 환경 변화가 있다.
우선 국내에서는 주요 철강기업들의 해외 투자 확대가 지역 공동화 우려를 낳고 있다. 포스코와 현대제철 등은 미국 등지로 투자를 확대하면서, 국내에선 신규 투자와 일자리 창출이 정체되고 있다.
여기에 국제 탄소 규제 강화가 압박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조사에서 응답자의 78%는 "국제적 탈탄소 요구가 강화되고 있다"고 답했다. "기후 대응이 늦어질 경우 산업 경쟁력이 약화될 것"을 우려한 응답자도 70%에 달했다.
이는 막연한 우려가 아니다. 2026년 1월부터 EU 탄소국경조정제도(CBAM)가 본격 시행된다. CBAM은 EU로 수입되는 철강 제품의 탄소배출량에 따라 인증서 구매를 의무화하는 제도다. 인증서를 미제출하면 건당 100유로의 벌금이 부과된다. 한국의 대EU 철강 수출액은 51억 달러로, 대EU 수출의 7.5%를 차지한다.
지역민들은 이 위협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71.2%는 "탈탄소가 이뤄지지 않으면 수출에 부정적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답했고, 78.8%는 "수출이 흔들릴 경우 지역경제도 직접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탄소 규제가 단순한 환경 이슈가 아니라 지역의 생존 문제라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중국은 38조 원 투자로 시장 선점 중
한국이 고민하는 사이 경쟁국들은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특히 중국의 투자 규모는 압도적이다.
2023년 6월 30일 기준 중국 270개 이상의 철강기업이 약 7억 6000만 톤의 조강 생산능력의 초저배출 전환을 완료했거나 진행 중이다. 철강 산업의 초저배출 전환에 대한 누적 투자액은 2000억 위안(약 38조 원)을 초과했다.
구체적인 사례도 눈에 띈다. 중국 철강의 탈탄소화를 선도하는 허베이철강그룹은 2023년 262억 7700만 위안(약 4조 9794억 원)을 투자해 연간 120만 톤 규모의 전기로 2기를 설치했다. 중국 기업 시노펙(SINOPEC)은 태양광으로 1만 톤급의 그린수소 생산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중국의 수소 생산 능력도 급속히 확대되고 있다. 올해 중국의 수소 생산량은 약 3700만 톤에 이를 전망이다. 이 중 재생 가능한 에너지 기반 수소 비중은 50%를 초과할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의 재생에너지 기반 수소 생산 프로젝트는 전 세계 생산력의 50% 이상을 차지한다.
중국이 대규모 투자로 그린수소 생산 인프라를 구축하고 저탄소 고급강 시장을 선점하는 동안, 한국은 정책 불확실성과 실행 지연으로 대응이 뒷걸음질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탈탄소 전환이 지역경제 살길"…65% 찬성
위기 인식은 해법에 대한 공감대로 이어졌다. 지역민들은 탈탄소 전환을 위기 탈출의 유력한 방안으로 보고 있었다.
조사에서 71.3%는 "탈탄소 전환이 지역경제에 긍정적 영향을 줄 것"이라고 응답했다. 70.5%는 "탈탄소는 지역경제의 핵심 과제"라고 평가했다. 탈탄소를 선택 사항이 아니라 필수 과제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구체적인 방안에 대해서도 지지가 높았다. 응답자의 65.3%는 수소환원제철 설비 전환에 찬성했다. 33.7%는 "가능한 한 빠르게 추진해야 한다"고 답했다. 수소환원제철은 철광석 환원 과정에서 석탄 대신 수소를 사용해 이산화탄소 배출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기술이다.
찬성하는 이유로는 일자리 창출, 온실가스 감축, 수출 경쟁력 강화가 꼽혔다. 신기술 도입이 지역에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고, 환경 문제를 해결하며, 국제 경쟁력까지 높일 수 있다는 기대였다.
반대 의견도 주목할 만하다. 반대 이유로는 '기술 한계'가 아니라 개발·설비 비용 부담(50.5%)이 가장 크게 나타났다. 기술 자체에 대한 회의보다는 막대한 비용을 누가 어떻게 부담할 것인가에 대한 우려가 컸다.
이에 따라 주민들이 정부에 가장 바라는 것도 수소 공급망·전력망 등 지역 기반 인프라 구축 지원(62.3%)이었다. 기업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대규모 인프라 구축을 정부가 지원해야 한다는 요구다.
독일·일본은 '조 단위' 지원…한국은 269억 원
주요국들은 이미 정부 주도로 대규모 지원에 나서고 있다.
독일 정부는 티센크루프의 수소환원제철 실증 설비를 위한 그린수소 조달에 약 24조 원 규모의 공적 자금을 투입했다. 티센크루프는 이를 바탕으로 뒤스부르크 제철소를 수소환원제철 생산공장으로 전환하기 위해 총 20억 유로(약 2조 7800억 원) 이상을 투자하고 있다. 2026년 연간 250만 톤의 직접환원철 생산을 목표로 한다.
스웨덴도 적극적이다. 철강사 SSAB, 철광업체 LKAB, 전력회사 Vattenfall이 합작으로 2016년 설립한 HYBRIT는 스웨덴 에너지기구로부터 50% 재정 지원을 받아 2026년 완전 이산화탄소 배출 제로 철강재 생산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일본은 철강분야에 약 4499억 엔(약 4조 491억 원)을 지원하고 있다. 이 중 약 1조 5000억 원 이상은 수소환원제철 기술의 상용화에 투자하고 있다.
반면 한국 정부의 지원은 미미하다. 정부는 저탄소 철강 기술 개발 예산액으로 약 2685억 원을 편성했다. 이 중 현존 설비 개선에 2416억 원, 수소환원제철 설비로의 전환에 269억 원을 편성했다. 저탄소 기술개발 예산액 중 약 90%가 탄소배출 감축과는 거리가 먼 현존 설비 개선에 배정된 셈이다.
생산 규모를 고려하면 격차는 더 벌어진다. 독일의 철강 생산량은 한국의 절반 수준(연간 약 3500만 톤)이지만, 지원금 규모는 한국보다 훨씬 크다. 연간 조강 생산량이 한국의 약 6% 수준인 스웨덴의 경우에도 한국의 6배 이상 금액을 투입해 철강산업의 탈탄소화를 지원하고 있다.
전환 비용 68조 원, 정부 지원은 1.4조 원
실제 필요한 비용과 정부 지원 간의 격차는 더욱 크다.
포스코가 가동 중인 고로를 모두 수소환원제철로 전환하는 데 드는 비용은 약 54조 원으로 추산된다. 기존 고로 매몰과 신규 설비 건설에 각각 27조 원이 소요된다. 현대제철 등을 포함하면 전체 전환비용은 68조 5000억 원으로 증가한다.
정부는 지난해 6월 총사업비 8100억 원 규모의 한국형 수소환원제철 실증 사업 예비타당성조사를 통과시켰다. 2026년부터 2030년까지 그린 철강에 지원하기로 한 금액은 1조 3827억 원이다.
필요 비용 68조 원 대비 정부 지원은 약 2%에 불과하다. 나머지 98%를 기업이 자체적으로 조달해야 하는 상황이다. 업계에서는 현재 철강업계의 수익성을 고려할 때 이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 예산 확대해야" 77%…지역의 절박한 목소리
지역민들의 요구는 명확했다. 응답자의 77%는 "정부가 탈탄소 전환에 더 많은 예산을 투자해야 한다"고 답했다. 61.9%는 "철강 산업의 중요성에 비해 정부의 관심과 지원이 충분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AI·반도체 등 신산업과 기존 산업 간 지원 균형이 적절하다고 평가한 비율은 31.9%에 불과했다. 신산업 육성도 중요하지만, 지역경제를 떠받쳐온 기존 산업의 전환에도 더 많은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정부가 4일 발표한 '철강산업 고도화 방안'에는 수소환원제철 실증과 청정수소 확보 등이 포함됐다. 그러나 구체적인 이행 전략과 실행 로드맵은 부재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선언적 목표만 있을 뿐, 어떻게 추진할지에 대한 구체적 계획이 없다는 지적이다.
기후솔루션 철강팀 강혜빈 연구원은 "철강벨트 지역은 이미 '산업 전환이 곧 지역경제의 생존'이라는 인식을 분명히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지역은 이미 위기를 체감하고 해법도 알고 있지만, 정부와 기업의 준비 속도는 이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강 연구원은 "수소환원제철, 그린수소, 재생에너지 등 핵심 인프라는 1~2년 안에 해결할 수 있는 과제가 아니"라며 "현재 제시된 전환 로드맵을 제대로 이행하기 위해서라도 보다 빠른 준비와 대규모 투자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세계 시장이 이미 저탄소 고급강 경쟁에서 앞서가고 있는 만큼, 정부와 기업은 석탄 기반 고로 폐쇄와 저탄소 공정 전환의 속도를 높여 지역의 절박한 우려에 실질적으로 답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