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치현의 기후과학] 빙하의 시대 ①...지구, 얼음의 서사를 시작하다
얼음의 행성, 지구의 자서전이 열리다.
빙하는 지구의 연대기다. 오래전 내린 눈이 쌓여 세월을 압축한, 하얀 빙옥처럼 투명한 시간의 결정체. 그러나 이 얼어붙은 보물상자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그 비밀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신화 속 태양의 불길에도 굴복하지 않고 하늘의 문지기가 된 거대한 설인처럼, 빙하는 오랫동안 자신의 출생 비밀을 감춰왔다.
우리는 그 서사시의 첫 장을 펼치려 한다. 눈 한 톨이 수정처럼 맑은 얼음 결정이 되기까지, 고요한 산간에서 빙하가 흐르기 시작하는 그 신비로운 순간까지, 이 기사는 얼어붙은 강이 어떻게 태어나고 성장하는지, 그 놀라운 과정을 따라간다. 과학적 사실 위에 문학적 상상력을 더해, 독자를 빙하 탄생의 현장으로 안내할 것이다. 이제 차가운 얼음 속에 숨겨진 뜨거운 비밀이 드러날 시간이다.
불의 행성, 얼음의 첫 숨을 쉬다
46억 년 전, 갓 태어난 지구는 지옥이었다. 마그마 바다가 끓고, 소행성과 운석의 폭격이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 불멸의 혼란 속에서 생명의 씨앗이 도착했다. 수십억 개의 혜성과 미행성이 얼음과 함께 지구를 강타하며, 지표에 물을 선사했다.
시간이 흐르며 충돌은 잦아들었고, 지구는 서서히 식었다. 마그마는 암반으로 굳고, 수증기는 짙은 구름이 돼 하늘을 덮었다. 마침내 지구 역사상 최초로 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원시 바다가 생겨났다.
하지만 그 바다는 끓는 냄비 같았다. 당시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는 약 7,000ppm, 현재의 16배에 달했다. 지구는 압력솥처럼 달아올랐고, 어디에도 얼음 한 조각 존재할 수 없는 초온실 행성이었다.
그러나 두 가지 변화가 빙하기의 서막을 열었다. 첫째, 당시 태양의 열효율은 지금보다 30% 정도 약했다. 둘째, 끊임없는 강우로 대기 중 이산화탄소가 바다에 흡수되며 지구의 ‘열병’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 모든 과정의 결정적 증거는 25억 년 전의 암석, 빙성암(glacial tillite)에서 발견된다. 캐나다와 남아프리카의 지층에서 발견된 이 암석은 거대한 빙하가 바닥 암반을 긁어낸 자국이다. 지구가 온도를 낮추고, 최초의 빙하를 탄생시켰음을 보여주는 확고한 증거다. 불의 시대는 저물고, 얼음의 시대가 찾아오고 있었다.
얼음을 부른 세 가지 열쇠
지구가 얼음의 시대에 들어가기 위해선 세 가지 열쇠가 필요했다. 대륙의 이동, 태양 궤도의 리듬, 대기 조성의 변화. 이 세 힘이 맞물리며 지구는 서서히 얼음을 품은 행성으로 변모했다.
(1) 대륙의 이동 — 남극의 고립, 냉기의 감옥이 열리다
3,400만 년 전, 초대륙 곤드와나가 완전히 분리되며 남극은 남쪽 끝으로 밀려났다. 그전까지 남극 주변 바다는 적도의 따뜻한 해류가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하지만 호주와 남아메리카가 멀어지며 이 연결고리가 끊겼고, 남극을 둘러싼 바다가 완전한 고리 모양의 통로로 바뀌었다.이때 남극 순환류(Antarctic Circumpolar Current, ACC)가 탄생했다. 적도의 온기를 차단하는 거대한 냉기의 벽이었다.
강력한 서풍이 이 해류를 돕자, 남극은 완전한 고립의 기후 요새로 변했다. 지구 자전에 따른 서풍이 남극 주변 바다를 동쪽으로 밀어내며 차가운 해류의 벽을 만들었고, 남극은 따뜻한 해류로부터 완전히 격리됐다.
불과 백만 년 사이, 남극의 평균 기온은 10~12°C 떨어졌다. 산악지대에 쌓인 만년설이 합쳐져 빙상이 자라났고, 대륙 전체를 덮는 얼음 왕국이 태어났다. 이 사건으로 지구의 해류 순환이 재편되며 열은 북반구로 이동했다. 지질학자들이 “남극의 고립이 지구 냉각의 시발점이었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 태양 궤도의 리듬 — 밀란코비치 주기, 지구의 우주적 심장박동
20세기 초, 세르비아의 천문학자 밀루틴 밀란코비치는 “빙하기는 우연이 아니라 태양 궤도의 리듬이 만든 결과”라고 주장했다. 그의 가설은 1976년 남극 보스토크 코어 분석으로 입증됐다. 얼음 속 산소 동위원소의 주기가 태양 복사 에너지의 변동과 정확히 일치했던 것이다.
지구의 기후를 조율하는 이 천문학적 심장박동은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다. 이심률(Eccentricity)은 지구 궤도의 타원 정도로, 10만 년 주기로 변한다. 타원이 클수록 계절 간 온도 차가 커진다. 지구의 자전축 경사(Obliquity)는 약 23.5°이지만 4만 년 주기로 22°~24.5° 사이를 오간다. 경사가 클수록 계절이 극단적으로, 작을수록 온화해져 빙하기가 찾아오기 쉽다. 세차운동(Precession)은 지구 자전축이 팽이처럼 흔들리며 2만6천 년 주기로 방향을 바꾸는 현상이다. 이 세 운동이 맞물리며 태양 복사량을 조절하고, 빙하의 성장과 후퇴를 지휘한다. 밀란코비치 주기는 지구가 태양의 호흡에 맞춰 춤추는 우주적 심장박동이다.
(3) 이산화탄소의 하강 — 히말라야의 기적
5천만 년 전, 인도 대륙이 유라시아판과 충돌하며 히말라야가 솟아올랐다. 그로 인해 지구는 새로운 실험실을 얻었다. 높은 산의 규산염 암석은 대기 중 이산화탄소와 반응해 화학적 스펀지처럼 작용했다. 비가 내리면 CO₂가 빗물에 녹아 탄산이 되고, 암석을 녹이며 탄산염 광물을 형성했다. 이 실리케이트 풍화작용 덕분에 대기 중 CO₂는 천천히 제거되어 바다로 흘러들었다. 그 결과 CO₂ 농도는 1,000ppm에서 600ppm 이하로 하락했고,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남극의 결빙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2023년 Nature Geoscience는 “이 풍화작용이 지구 냉각의 핵심 트리거였다”고 밝혔다. 지구는 스스로의 온도를 조절할 줄 아는 존재였다. 대륙이 솟으면 풍화가 늘고, CO₂가 줄면 기온이 내려가며 균형을 되찾았다. 히말라야의 돌 하나와 빗물 한 방울이 수천만 년에 걸쳐 행성의 기후를 바꾼 셈이다.
남극의 눈이 열리다 — 첫 얼음의 서명
남극의 회색 암석 위에는 거대한 얼음이 지나간 흔적이 새겨져 있다. 3,400만 년 전, 에오세와 올리고세의 경계에서 지구 기후는 돌이킬 수 없는 변곡점을 맞았다. 남극의 평균 기온은 10°C, 대기 중 CO₂는 600ppm 이하, 해수면은 지금보다 70m 낮았다.
남극은 순환류에 둘러싸여 고립됐고, 따뜻한 해류는 더 이상 닿지 못했다. 눈은 녹지 못한 채 얼어붙었고, 그것이 지구 냉각의 서막이 됐다. NASA의 ICESat-2 프로젝트는 이 시기 얼음이 처음 형성된 지점을 남극 서부 고지대에서 확인했다. 작은 빙설이 서로 결합하고, 그 위에 쌓인 눈이 압축되며 남극 대륙을 덮는 거대한 빙상이 자라났다.
현재 남극의 얼음 면적은 1,400만㎢, 두께는 4,776m, 지구 담수의 60% 이상을 품고 있다. 남극은 그저 얼음의 땅이 아니라 지구의 온도를 유지하는 거대한 냉각엔진이 된 것이다.
북반구의 대답 — 그린란드의 탄생
300만 년 전, 파나마 지협이 수면 위로 떠오르며 해류 시스템이 뒤바뀌었다. 태평양과 대서양을 잇던 통로가 사라지자 따뜻한 해류는 북대서양으로 쏠렸다. 뜨거워진 바다에서 증발한 수증기는 북극으로 흘러가 폭설을 쏟아냈고, 영하의 기온 속에서 눈은 녹지 않았다.
수천 년 동안 쌓인 눈은 압력에 눌려 단단한 얼음으로 변했고, 두께 3km에 달하는 그린란드 빙상(Greenland Ice Sheet)이 형성됐다. 이 빙상은 지구 담수의 9%를 저장하며 해류와 대기 순환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지금, 그린란드는 매년 2,740억 톤씩 사라지며 해수면 상승(1mm/yr)을 촉진하고 있다. 북반구의 마지막 빙상이 녹아내리는 것은 단순한 기후 변화가 아니라, 지구 시스템의 균형이 무너지고 있다는 경고다.
얼음의 숨결 — 260만 년의 춤과 시간의 기록
260만 년 전 이후, 지구는 밀란코비치 주기의 리듬에 따라 빙하기와 간빙기를 반복했다. 지구가 숨을 쉬듯 팽창과 수축을 되풀이하고 있다. 빙하가 확장될 때 해수면은 현재보다 120m 낮아져 대륙 사이에 육지 다리가 드러났다. 이 얼음 다리를 건너 호모 에렉투스는 아프리카에서 유라시아로 이동했고, 인류 문명은 퍼져나갔다.
얼음은 파괴자가 아니라 위대한 조각가였다. 노르웨이의 피오르드, 북미의 대평원, 한국 동해안의 단구까지. 우리가 지금 보는 많은 풍경은 빙하가 남긴 예술 작품이다. 빙하는 또한 지구 시간의 기록 장치다. 남극의 얼음 속에는 과거 대기의 비밀이 고스란히 보존돼 있기 때문이다.
보스토크 코어(42만 년), EPICA Dome C 코어(80만 년)는 과거 기후의 타임캡슐이다. 기록에 따르면 빙하기에는 CO₂ 180ppm, 간빙기에는 280ppm을 오갔으며, 기온 차는 약 10°C였다. 이산화탄소와 기온의 상관관계는 무려 99%에 달한다. 2025년 현재, 대기 중 CO₂는 425ppm으로, 지난 150만 년 동안 한 번도 도달한 적 없는 수치다.
빙하가 간직해온 기록은 우리에게 경고한다. 지구 시스템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으며, 우리는 역사상 가장 급격한 기후 변화의 시대를 살고 있음을.
사라지는 얼음 — 균형의 붕괴
지구의 얼음은 지금도 소리 없이 무너지고 있다. 남극에서는 매년 2,200억 톤, 그린란드에서는 2,740억 톤의 얼음이 사라진다. 초당 1만 톤의 담수가 바다로 쏟아져 들어가는 셈이다. 1900년 이후 해수면은 23cm 상승했고, 그 속도는 매년 4.5mm로 빨라지고 있다.
진짜 위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깊은 바다 속에 있다. 남극의 녹은 물이 바다의 염분을 희석시켜, 적도에서 북극으로 따뜻한 물을 실어 나르는 지구의 거대한 해류 엔진 — 대서양 자오선 순환(AMOC) — 을 약화시키고 있다. 연구에 따르면 이 순환은 20세기 중반 이후 15% 이상 느려졌다. 이 거대한 흐름이 멈춘다면 유럽은 혹독한 추위에, 열대 지역은 폭염과 홍수에 휩싸일 것이다.
지구의 기후는 얼음과 바다, 대기가 맞물린 섬세한 교향곡이다. 빙하가 사라진다는 것은 행성의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260만 년 동안 이어진 지구의 호흡 리듬이 깨지고, 행성의 생명 순환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얼음 아래의 생명 — 죽은 땅의 심장
1.5km 두께의 얼음 아래, 죽은 땅이라 여겨졌던 남극의 심장부에서 생명의 신호가 감지됐다. 2022년 케임브리지대 연구팀은 남극 빙하 아래 1.5km 지점에서 미생물 군집을 발견했다. 이들은 태양 대신 빙하 아래 암반과의 화학반응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화학합성 생명체였다.
암석에서 나온 미네랄과 이산화탄소로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지구상 가장 고독한 생명의 형태였다. 이 미생물들은 메탄을 생성하고, 빙하의 융빙주기(얼음을 녹이는 주기)에 따라 탄소를 흡수하고 방출하며 지구 물질 순환에 관여해왔다.
남극 빙상은 이들을 보존하는 타임캡슐이자, 지구 생명체의 회복력을 보여주는 살아 있는 증거다. 과학자들은 “얼음 아래에는 죽음이 아니라, 느리게 뛰는 생명의 심장이 있다”고 말한다.이 발견은 화성이나 유로파 같은 외계 행성 생명체 탐사에도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어둠과 추위 속에서도 생명은 스스로 길을 찾는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다.
지구가 첫 숨을 남긴 자리, 얼음이 시작된 순간
지구의 열이 식어가던 먼 옛날, 대기 속 수증기가 처음으로 응결하며 얼음이 태어났다. 그 결정들이 쌓이고 압축돼 하나의 단단한 층을 이루었다. 그렇게 빙하는 지구가 남긴 첫 번째 물리적 기록이 됐다.
얼음 속에는 공기가 머물고, 공기 속에는 시간이 갇혔다. 그 안엔 수만 년 전의 바람, 바다의 온도, 대기의 흔적이 정밀하게 보존돼 있다. 과학자들은 그 층을 하나씩 분석하며 지구의 호흡 리듬을 읽어낸다. 얼음은 말이 없지만, 그 안의 분자들은 한 시대의 기후와 생명의 움직임을 정확히 기억한다.
지구는 여전히 새로운 얼음을 만들고 있다. 히말라야의 정상에서, 알래스카의 계곡에서, 겨울마다 내리는 눈은 다시 압축돼 빙하로 태어난다. 그러나 순환 속도는 점점 느려지고 있다. 따뜻해진 대기와 바다는 새로 태어난 얼음을 성숙하기 전에 녹여버린다. 매년 수천억 톤의 얼음이 사라지고, 그만큼의 지구 기록이 함께 사라진다.
빙하는 생명의 기원을 품은 행성의 연대기다. 그 얼음 속에는 지구가 자신을 빚어온 서사가 새겨져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는 얼음을 연필 삼아 자신의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다. 그 느린 필체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수만 년 뒤에도 남을 지구의 고백이다. 지구가 인류를 위해 기록을 남기는 동안, 우리는 빙하를 위해 무엇을 남기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