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위기로 시작된 변화...기후대응 정책 변화 초석 될까?
우리나라는 최근 정치적 혼란을 지나 기후·에너지 정책에서 새로운 방향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에 이어 탄핵과 조기 대선이라는 혼란을 지나는 사이, 새 정부는 기후위기 대응과 에너지 구조 개편을 국정 과제 중 하나로 내세웠다. 정치적 전환기를 계기로 기후대응 정책 역시 시험대에 올랐다.
대선 국면에서 주된 관심사는 정치 안정과 정권 교체 구도였다. 이 가운데 한국 시민사회는 단순 정권 교체를 넘어선 기후정책 전환을 요구했다. 특히 환경단체 등은 온실가스 감축 목표 상향, 정의로운 전환 지원, 기후에너지부 신설 등 주요 정책을 직접 제안하기도 했다.
이러한 요구는 캠페인을 넘어 'TV토론 의제 설정'이라는 제도적 변화로도 이어졌다. 주요 환경단체들이 연합해 만든 '기후정치바람'은 '기후위기 단일 의제 TV토론'을 촉구하며 전국 곳곳에서 기자회견과 캠페인을 이어갔다. 특히 조기 대선을 앞두고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1천 명 이상의 시민이 참여해 후보자들에게 직접 질문을 보내는 행동이 이어지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중앙선거방송토론위원회는 시민사회 요구를 반영해 <대통령 후보 사회분야 TV토론>에서 기후위기 대응을 사상 처음 독립된 공식 의제로 채택했다. 이는 1997년 한국 대통령 TV토론이 도입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다만 토론회 직후 핵심 쟁점에 대한 실질적 논의가 부족했다는 평가가 뒤따랐다. 일부 후보는 온실가스를 전혀 언급하지 않거나, 온실가스 감축을 언급한 후보 중에서도 구체적인 목표 수치는 제시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대선 후보자 TV토론은 한국 공직선거법 제82조의 2에따라 선거방송토론위원회가 주관하며, 후보자 정책과 공약을 비교·검증하고, 유권자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취지로 개최된다.
기후위기비상행동은 논평에서 "설익은 선입견이 난무했고, 기후재난에 대한 진지함은 사라졌다"며 "후보자들은 기후위기의 시대에 전향적 전환에 대한 큰 그림을 제시하지 못했다. 공공 재생에너지, 탈원전, 기후대응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 부족이 주요 후보들의 공통된 한계였다"고 꼬집었다.
청년기후단체 빅웨이브 김민 상임공동대표는 2022년 제20대 대선 당시 '기후위기 원포인트 TV토론회'를 요구했던 캠페인을 주도했으나, 성사되지 않았고 이후 처음으로 성사된 '기후의제 토론회'였다. 그는 "특히 중요하게 봤던 쟁점은 대통령 취임 직후 기간인 9월까지 2035년 국가 온실가스감축목표(NDC)를 제출해야 한다는 점이었다"며 중요한 내용이 토론회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았음을 지적했다.
케이팝포플래닛 박진희 캠페이너는 "기후위기는 2030년까지가 골든타임이고, 차기 정부 임기 내내 그 시기를 책임져야 한다. 그럼에도 기후위기를 어떻게 해결하겠다는 방향성조차 없이 서로 공격하는 데만 치중했다는 점이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기후위기 대응이 사상 처음 공식 의제로 다뤄졌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도 있었다. 기후위기비상행동 김은정 공동운영위원장은 앞서 '기후 단일의제 토론회 요구 캠페인'에 참여한 바, "이번 토론회가 기후 단일의제 토론을 요구해온 시민사회 캠페인의 결과라는 점에서 의미 있다"고 봤다.
당시 기후의제는 2차 토론인 '사회분야'에서 채택된 주제지만, 1차 토론이었던 '경제분야'에서도 주요 후보들이 언급했다. 빅웨이브 김민 상임공동대표는 "과거 대선에서는 기후가 단독 의제로 다뤄지기 어려웠던 점을 고려하면, 지금은 다양한 사회 의제와 기후가 함께 논의되고 있는 상황 자체는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아쉬움으로 출발한 기후공약, 처음 등장한 '생물다양성'
조기 대선 주요 후보 중 10대 공약에 기후의제를 전혀 언급하지 않거나, 에너지 안보 수준에서 포함한 가운데 이재명 대통령은 후보 시절 10대 공약 중 마지막 항목에 기후공약을 배치했다.
주요 공약으로는 ▲온실가스 감축목표 수립 ▲2040년까지 석탄화력발전 폐쇄 ▲에너지고속도로 구축 ▲기업 탈탄소 전환 지원 ▲노후건물 에너지효율화 ▲수송부문 탈탄소 가속화 ▲영농형태양광 보급 ▲탈플라스틱 국가 로드맵 수립 ▲한반도 생물다양성 복원 ▲4대강 재자연화 ▲탄소감축 인센티브 강화 ▲정의로운전환 실현 등이 제시됐다.
다만, 환경단체에서는 당선 이후 가까운 시기인 9월 한국이 2035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유엔에 제출해야 한다는 전제 안에서 구체적인 계획이 드러나지 않은 점을 비판했다. 한국 기후비영리단체 플랜1.5 권경락 정책활동가는 "민주노동당을 제외하면 나머지 정당에서는 구체적인 기후공약이라 할 만한 내용이 거의 없는 수준"이라고 평가하면서도, "일상적인 대선이 아니기 때문에 사정은 어느 정도 이해한다"고 덧붙였다. (민주노동당 권영국 후보는 득표율 0.98%을 보였으나, 대선 후보 중 기후공약을 가장 구체적으로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어 권 활동가는 "이번 대선과 총선을 비교해 보면 경제성장이나 민주주의 회복과 같은 중심 의제들에 기후위기가 후순위로 밀린 인상이 있다"며 정치적 변수로 인해 기후의제가 후순위로 밀려났다는 지적도 함께 했다.
한편 '생물다양성'이 역대 선거 공약에서 처음 등장했다는 의미도 주목됐다. 당시 전문가들은 실질적 이행 가능성과 제도적 기반 마련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강운 홀로세생태연구소장은 "생물다양성이라는 단어가 공약에 담긴 것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전제하면서 "정책에서 생물다양성을 동식물의 문제로만 좁혀 보는 경향이 있지만, 더 나아가 생존과 연결된 정책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강운 소장은 "멸종위기종을 나라에서 지정해도 보호조치 없이 방치하거나, 개발 과정에서 불편하다는 이유로 등급을 낮추는 일이 반복된다"며 "누가 책임지고 지속적으로 보전 정책을 이끌 수 있을지에 대한 선제적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멸종위기종대선정책연대 정책팀 김현태 활동가는 "생물다양성이 정치의제에 발을 들인 첫 출발선"이라고 평가하며, "기후위기는 산업과 에너지, 탄소중립이라는 중심축이 있어 하나의 의제로 통합되지만, 생물다양성은 종마다 서식지와 보호 방식이 달라 범용적인 정책이 어려운 구조"라고 말했다.
국립생태원에 따르면 국내 지정된 멸종위기종은 282종이다. 이들 모두 포유류, 조류, 양서류, 곤충류 등 10개 분류군으로 나뉘며, 법 적용 방식과 관리 기관도 각각 다르다. 김현태 활동가는 "전문가 간에도 분야가 나뉘어 있어 소통이 쉽지 않고, 이를 통합할 컨트롤타워가 부재해 생물다양성 보전이 중앙 정책에서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우려와 기대 가운데 추진되는 '기후에너지부 신설'
기후의제가 조기 대선에서 부상하게 된 배경에는 대내외 여건 변화가 자리한다. 국제사회는 지구 평균기온 상승을 1.5도 이내로 제한하기 위해 2035년까지 2019년 대비 최소 60% 이상의 온실가스 감축이 필요하다고 권고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오는 9월까지 새로운 2035년 온실가스 감축목표(NDC)를 유엔에 제출해야 하며, 헌법재판소가 장기 감축 경로의 법제화를 명시적으로 요구한 바 있다. 전임 정부가 설정한 40% 감축 목표는 국제 기준에 한참 미달한다는 지적을 받아왔고, 이에 따라 새 정부는 감축 목표 상향과 법제화라는 이중 과제를 동시에 안게 됐다.
이재명 대통령은 당선 직후 4일 취임선서와 함께 재생에너지 전환을 강조하며 "에너지 수입 대체, RE100 대비 등 기업 경쟁력 강화에 더해 촘촘한 에너지 고속도로 건설로 전국 어디서나 재생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게 해 소멸 위기 지방을 살리겠다"고 언급한 바 있다.
녹색전환연구소 등 시민사회단체는 같은 날 입장문에서 "2030년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NDC) 달성은 물론, 2040년 탈석탄 등 기후위기 대응의 시험대에 올랐다. 윤석열 정부에서 후퇴한 기후정책을 시급히 복구하고, 2050년 탄소중립 목표 달성을 위한 기반을 닦아야 할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법무법인 세종은 ‘제21대 대통령선거: 그 결과와 영향’ 보고서에서 "기후위기 대응이 곧 산업정책이 되는 시대가 본격화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국 기후 싱크탱크 녹색전환연구소는 이재명 정부가 추진해야 할 10대 과제로 ▲기후생태헌법 반영을 위한 개헌 논의 ▲2030 NDC 이행 및 2035 NDC 설정 ▲녹색산업 육성 정책 ▲재생에너지 전환 가속화 ▲독립적 에너지규제위원회 설립 ▲2040 탈석탄 위한 정의로운 전환 ▲기후에너지부 신설 등 기후통합 거버넌스 구축 ▲기후재정 체계화 ▲기후사회재난 대응 체계 개편 ▲지역기반 기후 일자리·돌봄 시스템 구축 등을 제시했다.
당선 직후 이재명 대통령이 후보 시절 공약한 '기후에너지부' 신설을 둘러싸고 여러 우려와 기대가 모였다. 녹색연합은 기후에너지부 신설 관련해 "기후에너지부가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주무 부처가 아니라 또 다른 신산업 육성과 부흥 부처로 전락해선 안 된다"면서 "‘에너지 신산업 진흥’ 중심이 아닌 ‘기후위기 대응 컨트롤타워’로 설계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대통령 혹은 국무총리 직속으로 설치해 부총리급 장관이 이끄는 독립 부처 구성을 제안하고, ▲탈핵 원칙 ▲에너지 공공성 강화 ▲수요관리 병행 ▲전력 분권과 지역균형 등을 조직 운영의 원칙으로 제시했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를 대체한 국정기획위원회는 기후에너지부 신설을 중심으로 정부조직 개편 논의에 착수했으며, 산업통상자원부의 에너지 기능과 환경부 기후 기능을 통합하는 방안을 중점 검토하고 있다. 이행력 강화와 정책 일관성 확보가 목표로 제시됐다.
전력공급 측면에서는 재생에너지와 원자력 발전 비중을 동시에 확대하는 ‘이원화 전략’을 택했다. 이는 탈석탄을 전제로 하되, 에너지 안보를 이유로 원전 비중도 늘리는 방식이다. 산업계는 공급 안정성을 기대하는 반면, 일부 환경단체는 에너지 전환 취지를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올해 발표된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따르면 한국은 2038년까지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을 8.4%에서 29.2%로 늘리고, 원자력 발전 비중도 확대할 계획이다. 반면 석탄과 LNG 발전 비중은 단계적으로 축소된다. 올해 상반기 기준 한국 원전 발전량은 화석연료 발전량을 넘어섰고, 석탄·LNG 수입은 전년 대비 20% 이상 감소했다.
정부는 대규모 해상풍력 단지 조성과 전국 산업단지를 연결하는 ‘에너지고속도로’ 구축, 에너지저장장치(ESS) 도입 확대 등도 추진 중이다. 최근 한국전력거래소는 에너지저장장치 중앙조달 시장을 개설해 전력계통 안정화 정책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이는 간헐성이 높은 재생에너지 확대에 따른 계통 안정화 방안 중 하나다.
그러나 시민사회 일각에서는 새 정부의 에너지정책이 공약과 배치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윤석열 전 정부에서 추진된 수도권 중심 산업정책이 새 정부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대표적 사례가 ‘용인 반도체 국가산업단지’다.
22일 환경운동연합 등 시민단체들은 기자회견에서 "윤석열 정부 당시 발표된 용인 반도체 국가산업단지 계획이 이재명 정부 들어 그대로 추진되고 있다"며 "지역 균형발전과 분산형 에너지 체계 구축이라는 공약에 정면으로 배치된다"고 밝혔다.
이들은 해당 산단이 연간 87.6TWh의 전력을 사용할 것으로 전망되며, 이는 2024년 한국 전체 재생에너지 생산량(63.2TWh)을 상회하는 수준이라고 밝혔다. 이어 "전국의 재생에너지를 모두 모아도 감당할 수 없는 대규모 전력 소비시설을 수도권에 집중시키는 것은 정의로운 전환과도 모순된다"고 지적했다.
또한 "해당 산단 가동을 위한 3GW급 LNG복합발전소 신설, 345kV 초고압 송전선 46개 노선 건설 등의 계획은 지방을 전력 수급지로만 바라보는 구조"라며 "지금이라도 용인 산단 계획을 전면 재검토하고, 분산형 에너지 체계 구축이라는 국정과제를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대안으로 ▲송전설비 최소화를 위한 HVDC(초고압직류송전) ▲에너지저장장치(ESS) ▲지중화 등의 기술과 함께, ▲전력수급기본계획 및 송변전설비계획 재수립 ▲노후 원전 수명 연장 중단 ▲지역별 전기요금제 도입 ▲전기사업법 개정 등을 요구했다.
한국 새 정부가 추진 중인 기후·에너지 정책 전환은 정치적 위기를 계기로 부상한 국정 과제로 평가된다. 앞으로 이 정책들이 얼마나 안정적으로 이행되고, 국제 기준과 실질적 감축 성과를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을지 주목된다. 국제사회와의 약속 이행, 국내 산업 전환, 사회적 수용성 확보라는 세 가지 과제를 동시에 풀어야 하는 상황에서 향후 정책 추진 속도와 실행력이 중요한 변수가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