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이롭게 태어났는데...플라스틱은 죄가 없다"

전시 플라스틱과의 공존, 그들과의 행복한 세상을 모색하다

2024-09-06     배진주 기자

 

기후위기 관련 전시가 고양 아람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왼편에 정찬부 작가의 '피어나다'. 버려진 플라스틱 빨대로 이뤄졌다. (사진 배진주 기자)/뉴스펭귄

[뉴스펭귄 배진주 기자] 전시 '플라스틱 파라다이스'는 플라스틱이 자연의 일부가 된 현재를 조명하고 플라스틱을 기후위기 주범으로 모는 태도에 반기를 든다. 책임의 소재를 물으며 앞으로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 질문한다. 

플라스틱의 시초는 당구공이다. 당구공 원재료인 코끼리 상아를 대신해 탄생했다. 플라스틱이 개발되지 않았다면 코끼리는 멸종했을지도 모른다. 온 세상에 깊숙이 자리 잡은 플라스틱은 어쩌면 자원으로서의 자연을 해방한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플라스틱에게 억울한 타이틀이 붙었다. 기후위기 주범.

피의자석에 오른 플라스틱을 상상해 보자. “저는 죄가 없습니다. 이롭게 태어났습니다. 죄는 낭비한 인간들에게 있습니다”. 전시 ‘플라스틱 파라다이스’는 이러한 플라스틱의 목소리에 주목한다.

현장에는 3가지 담론이 있다. ‘플라스틱 월드’는 플라스틱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풍경에 주목한다. ‘플라스틱 토피아‘는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에서 딴 말로, 플라스틱의 명암을 비춘다. ‘플라스틱 제너레이션’은 ‘플라스틱 시대’에 주목해 ‘공존’을 위한 태도를 넌지시 제시한다.

이 중 세 작품을 소개한다. 플라스틱 월드에 이진경, 플라스틱 토피아에 미승, 플라스틱 제너레이션에 죽음의 바느질 클럽 작품을 살펴본다. 작가의 시선이 머문 플라스틱 세상에 주목한다.

● 이진경 <오봉도>

아름다운 산수화... 알고 보니 '비닐봉지'

다섯 개의 화폭에 산세가 웅장하다. 이진경 작가의 '오봉도'의 산은 사실 '비닐봉지'다. (사진 배진주 기자)/뉴스펭귄

커다란 화폭 다섯 개가 한쪽 벽을 가득 채운다. 흑백으로 표현된 산세는 깊고 웅장한 자연을 떠오르게 한다. 산 중턱에 오른 듯 벅찬 마음으로 감상하다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전시장 바닥에 그림 속 산이 보이는데, 다름 아닌 ‘비닐봉지’다.

이진경 작가의 산수화는 기존의 자연을 담지 않았다. 모양은 비슷하나 비닐봉지 산이다. 작가는 작품 설명을 통해 “자연의 신성함을 빌어 조선 왕조 번영을 기원하던 ‘일월오봉도’를 비닐로 재구성했다”고 밝혔다. 신성함을 빗댄 자연을 일회성 소비재 비닐로 대체했다. 그는 “인간의 욕망이 어느새 자연을 잠식해 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진경 작가의 '비닐봉지' 산. (사진 배진주 기자)/뉴스펭귄

평범한 그림인 줄 알았을 땐 ‘진짜’ 산수화로, 비닐임을 알아채고 ‘가짜’ 산수화라 여겼다. 그러던 와중 진짜와 가짜로 구분하는 게 적절한가 의심이 들었다. 어쩌면 오늘날의 산수화는 작가가 표현한 비닐 산수화가 더 ‘진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옛 산수화는 정말 그런 모습이었으리라. 첩첩산중이 펼쳐지고, 상쾌한 바람이 불고, 생물 다양성이 넘쳐나는. 어쩌면 우리 시대의 산수화는 비닐로 이루어진 게 ‘진짜’일 수도 있다. 아름다운 자연이 그대로 있을 거라는 착각에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주변엔 너무도 많은 플라스틱과 쓰레기가 넘쳐나는데도 말이다.

쓰레기를 잘 분리해 버리기만 하면, 내 눈앞에서 사라지면 문제는 해결된 듯 보인다. 세계도 정부도 처리 체계를 잘 구축했으리라, 따르기만 하면 별 이상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지구의 여러 곳엔 쓰레기 산이 넘쳐난다. 그림 속 비닐 산은 판타지가 아니다. 현실이 그대로 반영된 사실주의다.

매립해도, 소각해도 쓰레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미세플라스틱, 온실가스 등으로 모양만 바뀌어 지구에 머문다. 자연의 일부가 된다. 비닐 산수화는 가짜가 아니었다. 진짜다.

● 미승 (폐화장품을 물감으로 사용한 그림)

폐화장품으로 그린 그림 “종이에 양보하세요”

분홍 벽 중간중간 화장품과 이를 활용한 그림이 보인다. (사진 배진주 기자)/뉴스펭귄

분홍빛 공간에 화사한 그림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입체적으로 표현된 인물들이 종이를 뚫고 튀어나올 것 같다. 섬세한 표현이 일품이다. 그림 사이사이 화장품이 비치돼 있다. 그림 속 인물들이 사용했다는 걸까? 아니다. 그림에 사용된 화장품이다.

미승 작가는 폐화장품을 활용해 그림을 그린다. 유통기한이 지나서, 질려서 등등의 이유로 버려질 위기에 처한 화장품. 그의 손에 닿으면 물감이 된다. 얼굴로 향했던 화장품은 종이를 만나 새로운 삶을 부여받는다. 작품 속 인물에 생기를 더해준다. 그의 작품을 다채롭게 만든다.

폐화장품을 활용한 그림. (사진 배진주 기자)/뉴스펭귄

그의 작품을 보고 난 뒤 내 곁을 떠난 많은 물건이 떠오른다. 각자의 역할은 다했던 것 같은데... 어쩌면 정해진 역할 외에 무수한 전환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작가의 폐화장품처럼, 자칫 쓰레기가 될 뻔한 것들은 쓰레기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 죽음의 바느질 클럽 ‘Plastic bag 시리즈’

힙하다! 비닐봉지!

죽음의 바느질 클럽 'Plastic bag 시리즈’. (사진 배진주 기자)/뉴스펭귄
페트병을 감쌌던 비닐이 전시장의 빛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사진 배진주 기자)/뉴스펭귄

주연, 조연, 단역, 엑스트라. 드라마를 이루는 캐릭터의 종류다. 비닐봉지의 위치는 어디쯤일까? 주연? 조연? 아마도 단역이나 엑스트라쯤이겠지. 나뒹굴다 쌓이곤 하는 비닐봉지가 전시장에 나타났다. 톡톡 튀는 실이 봉지를 관통해 생동감 있는 문양과 질감을 만든다. 여기, 주연이 된 비닐봉지가 있다.

복태, 한군 작가는 ‘죽음의 바느질 클럽’을 운영한다. 손바느질이 가능한 여러 영역을 탐구하는 클럽은 비닐봉지에 주목했다. 태국 생활을 하던 두 작가는 비닐봉지가 쌓이는 나날 중 비닐의 재사용을 시도했다. 버려진 비닐이 두 작가를 만나 새롭게 태어났다.

비닐봉지가 힙할 수 있다니! 실이 관통한 비닐봉지는 더 이상 이전의 캐릭터가 아니었다. 자신감 있고 당찼다. 쓰레기 취급에서 벗어났고 주인공의 자리를 꿰찼다. 이런 봉지라면, 어디서 어떻게 메도 멋질 것 같았다.

뱅글뱅글 돌아가는 비닐봉지는 신상 패션 소품 같다. 패션쇼에 출전한 모델 같기도. ‘이번 컬렉션의 주인공 다채롭게 꿰 비닐백!’. 비닐봉지를 보며 주변에서 무수하게 쓰이는 갖가지 조연 소비재에 주목한다. 새로운 쓰임, 새로운 가치를 입을 소비재를 위하여!

고양아람누리의 전경. 중앙 아람미술관에서 '플라스틱 파라다이스!?' 전시가 열리고 있다. (사진 배진주 기자)/뉴스펭귄

기후위기 전시 ‘플라스틱 파라다이스!?’. 어딘가 이상하다. 근심 걱정 없이 행복할 수 있는 곳이라는 뜻의 파라다이스, 기후위기 주범으로 몰리는 플라스틱 이 두 단어는 어울리지 않았다.

입장 전 어딘가 뒤틀렸던 느낌이 전시를 보며 점차 해소된다. 플라스틱은 죄가 없다. 제목 어딘가에 우리를 발견한다. 플라스틱을 만들고 소비하는’, ‘몰아내려 하는’, 몰아내는 데 ‘실패’한 우리 모두가 보인다. ‘플라스틱 파라다이스’는 앞으로 어떤 걸음을 내딛을지, 플라스틱과 어떻게 공존할지 숙제를 남긴다.

“저는 이롭게 태어났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파괴와 낭비에서 멈춰 주세요. 저와 함께 파라다이스를 만들어요.“(무죄 판결받은 플라스틱의 발언)

전시 <플라스틱 파라다이스!?>

참여 작가: 최성임, 이진경, 미승, 망무, 황문정, 정찬부, 퍼블릭 퀘스천, 죽음의 바느질 클럽, 한국국제교류재단

일시: 2024년 7월 25일~11월 3일 / 화~일요일 오전 10시~오후 6시

장소: 고양아람누리 고양시립 아람미술관(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중앙로 1286)

가격: 6000~1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