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피셜 지오그래픽] ⑨ 히말라야 동쪽 낙원, 윰탕 밸리 가는 길_첫 번째

  • 남준식 객원기자
  • 2020.12.03 08:00
 

[내’피셜 지오그래픽]은 한 대학생 지리학도가 10개 나라를 ‘탐험’한 기록이다. 이런 류의 기록에서 일반적으로 쓰이는 ‘배낭여행’이라는 단어 대신 탐험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찾아간 곳들의 지구생태적 가치가 우선은 크기 때문이다. 더불어 지구의 살갗 아래까지 날 것 그대로 바라 본 시선이 단순한 여행의 차원을 넘은 까닭이다. 세상을 자기 희망대로 단순화하지 않았을 때야 비로소 그전까지 보이지 않던 문제들이 보이기 시작한다(김영민, 공부란 무엇인가 중에서). 이 연재물이 가치를 갖는 것은, 젊은 지리학도가 170일간의 탐방을 통해 새로운 것들, 현상들, 문제들을 발견했다는데 있다. 이런 연유로, 연재물의 타이틀 [내’피셜 지오그래픽]은 ‘내가 쓴 특별한(스페셜)’, ‘내가 생각을 교정하여 정의한(나의 뇌피셜)’ 등의 중첩된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연재물은 모두 10회에 걸쳐 독자들과 만난다. [편집자]

 

시킴(Sikkim)은 네팔과 부탄, 티벳 사이에 있는 고립된 지역이다 (사진 남준식) / 뉴스펭귄

2017년 10월, 입대를 앞두고 인도를 여행했다. 인도 전체를 여행한 건 아니고, 시킴 주(州)의 윰탕 밸리(Yumthang Valley)라는 곳을 찾아 떠난 길이었다. 나만의 '퀘렌시아'나 '샹그릴라' 쯤 되는 곳에서, 며칠 편안하게 머물다 오겠다는 의미로. 2주의 일정으로 짐을 꾸렸다.

보통 북인도를 여행한다고 하면, 펀자브·카슈미르·라자스탄 등 3개주(州)를 많이 가는 것 같다. 특히, '오래된 미래'(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저(著))로 유명세를 탄 라다크의 수도 레(Leh)에는 한국 여행자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고 들었다. 

그에 반해 윰탕 밸리? 그 음탕한 어감과는 사뭇 다르게, 여행자들의 입방아에 올라 침 한 방울 튄 적 없는 경력을 자랑하는 변방의 은둔지라고 봐도 무방했다. 이제는 찾는 이 없는 오래된 블로그 하나만이 내가 찾는 정보의 전부였으니, 일면식도 없는 사진 속 여인에게서 어떠한 동질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저 나와 같은 사람이 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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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 동안 물류창고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서 100만원을 모았다. 그만하면 충분했다. 왜냐하면 인천에서 뉴델리를 왕복하는 아시아나항공편의 표삯이 40만원이 채 안되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비수기여도 그렇지, 텅텅 빈 이코노미석에 혼자 덩그러니 앉아 승무원들의 집중 서비스를 받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얼마 뒤, 그 노선은 폐지됐다.)

왠지 문지방에 앉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니, 이렇게 멋진 구도가 숨어있을 줄이야! (사진 남준식) / 뉴스펭귄 

윰탕밸리에 앞서 '비운(悲運)의 도시' 파테푸르 시크리(Fatehpur Sikri)를 먼저 가보기로 했다. '승리의 도시'라는 뜻의 파테푸르 시크리는 16세기 후반 무굴제국의 악바르 대제가 건설한 도시로, 1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무굴제국의 수도로서 그야말로 '하루살이 같은 짧은 영화'를 누렸다.

이곳은 도시의 형태와 배치에 있어서 인도 도시계획의 진보에 크나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받으며 1986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그중에서도 특히 자마 마스지드 사원은 인도에서 가장 큰 회교사원으로 꼽히는 중요한 역사적 산물 중 하나다. 

그런데, 아뿔사, 오늘내일하던 휴대전화가 결국 고장나고 말았다. 화면이 나간 것이다. 디지털 치매라는 게 이런 걸까? 순간 바보가 되어버린 듯 여행에 차질이 빚어졌다. 나는 낯선 곳에 가면 내가 어디에 있는지 인지가 되어야 직성이 풀리곤 하는데, 당장 GPS가 잡히지 않으니 속이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IT강국이자 10억명이 넘게 살아가는 인도에서 이 정도 문제 쯤은 거뜬히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자 조급한 마음이 한결 사그라들었다.

누군가의 소개로 홍길동을 찾아가면, 홍길동은 아무개를 알려주고, 아무개를 찾아가면 임꺽정을 알려주는 식으로, 오토릭샤를 여러 번 갈아타며 발품을 판 끝에, 마침내 어느 지하상가의 휴대폰 수리점에 도착했다

글로는 단 세 줄이지만 수리점에 이른 과정은 첩보액션의 한 장면을 방불케 했다. 순전히 '전지적 작가 시점'이지만.

휴대폰 수리공은 이 구역의 맥가이버라고 했다. 뚝딱뚝딱 뜯어고치는 그 솜씨가 왜 그에게 그런 별명이 붙었는지 단번에 알아채게 해주었다. 물론 정품이 아니라 출처를 알 수 없는 가품이었지만, 물에 빠진 놈 건져 놓으면 봇짐 내놓으라 할 차례라고, 그건 내게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너무나 감사한 마음에 부르는 돈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으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시각은 무뎌지지만, 후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다. 오래도록 무의식의 저편에 남아 있다가, 수면 위로 불쑥 나타나 과거 어느 한 순간의 기억을 떠올려 준다. 지금도 오토바이가 뿜고 간 매연이 주변의 공기, 온도와 적절한 배합을 이뤄 어떠한 임계점에 다다른 냄새를 발산할 때면, 인도의 그 복잡한 거리를 활보하던 순간이 이따금씩 떠오르곤 한다. 

수술 중인 아이폰 (사진 남준식) / 뉴스펭귄

힌두교의 최대 성지, 바라나시(Varanasi)까지는 버스를 타기로 했다. 거리가 600km쯤 되니까 서울에서 부산 한 번만 다녀오면 되겠거니 가볍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건 뭐 서울에서 베이징을 가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교통체증 때문에 바퀴가 채 한 바퀴를 돌지 못하는 상황이 한동안 이어졌다. 그렇게 18시간을 관짝에 든 송장처럼 가만히 누워있었다. 흔들리는 버스에서만큼 달콤한 잠도 없지만, 그 때 만큼은 자는 게 지겨웠다. 

그나마 내가 그 번뇌의 시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까닭은, 오줌이 마려워 잠시 내렸다가 우연히 먹은 커리, 그 커리가 준 신선한 충격 덕분이었다. '3분카레'에 길들여져 퇴화된 혀가 바야흐로 야생에서 날고기를 뜯던 시절의 첨예한 미각을 찾는 순간이었다고나 할까. 위생은 충격적이었으나 오히려 그 더러움은 곧 진정성으로 승화되었다. 바퀴벌레 두 마리가 나란히 익사해 누워있는 것마저 십분 용서되고도 남는 맛이었다. 아무튼 나는 그때 나만의 '커리 이론'을 정립하였으니...

"김치가 생각나지 않는다면, 그건 진짜 맛있는 커리다"

참고로 인도에서는 커리를 커리라고 부르지 않았다. 메뉴에는 아예 커리라는 글자가 보이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아무 백반집에 가서 "찌개 주세요"하면 된장찌개·김치찌개·

순두부찌개·동태찌개 중에 어느 걸 내야할지 난감하듯, 인도에는 수많은

종류의 커리가 각각의 이름을 갖고 있으니, 복불복으로 골라 먹는 재미도

쏠쏠했다. 

(왼쪽부터) 3시간 경과, 11시간 경과, 16시간 경과. 가만히 있는 것도 고문이다 (사진 남준식) / 뉴스펭귄
프로페셔널한 주방장의 손놀림과 (사진 남준식) / 뉴스펭귄
관중을 압도하는 쇼맨십 (사진 남준식) / 뉴스펭귄
여기에 완벽한 합(合)이 갖춰지면 (사진 남준식) / 뉴스펭귄
기가 막힌 커리가 완성된다 (사진 남준식) / 뉴스펭귄

바라나시는 과연 인도의 냄새, 아니 힌두교의 냄새가 가장 짙은 곳이었다. 예전에 타고르(Tagore)가 조선을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고 불렀던가, 인도라는 혼돈의 도가니 안에서 나고 자란 그의 눈에 조선은 분명 고요한 나라였을 것이다. 반대로, 그 고요한 나라에서 온 어느 이방인의 눈에 인도 또한 굉장히 이국적인 나라였으니, 같은 아시아로 묶는다는 것이 허황된 것임을 생각했다.

이곳 사람들은 갠지스강을 '강가(Ganga)'라고 불렀다. 강의 여신인가 어머니의 신인가 하여튼 그랬다. 강가에서는 목욕도 하고 시체도 태운다. 목욕은 산 자의 의식이요, 화장은 죽은 자의 의식일지인데, 사뭇 상반돼 보이는 두 의식이 그들의 신성한 장소에서 함께 치러지는 것을 보아 하니, 결국엔 삶과 죽음의 본질에 경계란 없는 것이고, 그것을 구태여 구분하기 위해 의식(ceremony)이란 것을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하는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나는 그들의 문화를 더욱 가까이서 기록하고 싶었지만, 무례하게 비춰질까 봐 함부로 카메라를 들이대지 못하던 차였다. 그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한 청년이 방금 전까지 시신을 태우던 장소로 나를 데려가서는 사진을 찍어도 좋다고 하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힌두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다시 태어난다고 믿기 때문에, 장례는 비통함이 아니라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치러진다고 했다. 따라서 굳이 '슬픈 척'할 필요 없었던 것이다.  

문화라는 가공(架空)에 길들여진 우리들의 정서가 가장 먼저 회복해야 하는 것은 '당혹감'이라고 했다. 이러한 당혹감의 충격은 현장을 떠나서는 만날 수 없는 것이며, 현장의 당혹감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먼저 주입하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여행자로서 지녀야 할 자세가 아닐까(신영복, 더불어 숲 중에서).

오른쪽은 강가, 왼쪽은 눈이 세 개 있는 것으로 보아 시바(파괴의 신)인 듯하다 (사진 남준식) / 뉴스펭귄
(사진 남준식) / 뉴스펭귄
(사진 남준식) / 뉴스펭귄
(사진 남준식) / 뉴스펭귄
사두(Sadhu)는 힌두교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고행하는 성자이다. 요가(Yoga)는 사두의 수행법이다 (사진 남준식) / 뉴스펭귄
(사진 남준식) / 뉴스펭귄

벌써 일주일이나 지나버렸다. 이러다가 윰탕 밸리는 커녕 제때에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나 모르겠다. 남은 일주일, 열심히 달려야 한다.

본격적으로 시킴 주로 들어가기 위해, 바라나시 외곽에 있는 무갈 사라이 기차역으로 갔다. 서두르는 내 마음을 놀리기라도 하듯, 세월아 네월아 기차는 연착에 연착을 거듭했다. 아무리 내가 쥐띠라지만, 토끼 크기만한 쥐가 떼를 지어 창궐하는 꼴을 차마 두 눈 뜨고 볼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역사 바깥으로 나와 세월을 낚기로 했다. 마침 디왈리(Diwali) 축제가 한창이어서 쉴 새 없이 터지는 폭죽으로 온거리가 반짝이고 있었다.  

도대체 제때 오는 열차가 없다 (사진 남준식) / 뉴스펭귄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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