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피셜 지오그래픽] ⑥ 유럽 최고봉 엘브루스, 고산 등반이 내게 가르쳐준 것

  • 남준식 객원기자
  • 2020.11.13 08:00
[내’피셜 지오그래픽]은 한 대학생 지리학도가 10개 나라를 ‘탐험’한 기록이다. 이런 류의 기록에서 일반적으로 쓰이는 ‘배낭여행’이라는 단어 대신 탐험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찾아간 곳들의 지구생태적 가치가 우선은 크기 때문이다. 더불어 지구의 살갗 아래까지 날 것 그대로 바라 본 시선이 단순한 여행의 차원을 넘은 까닭이다. 세상을 자기 희망대로 단순화하지 않았을 때야 비로소 그전까지 보이지 않던 문제들이 보이기 시작한다(김영민, 공부란 무엇인가 중에서). 이 연재물이 가치를 갖는 것은, 젊은 지리학도가 170일간의 탐방을 통해 새로운 것들, 현상들, 문제들을 발견했다는데 있다. 이런 연유로, 연재물의 타이틀 [내’피셜 지오그래픽]은 ‘내가 쓴 특별한(스페셜)’, ‘내가 생각을 교정하여 정의한(나의 뇌피셜)’ 등의 중첩된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연재물은 모두 10회에 걸쳐 독자들과 만난다. [편집자]

 

캄차카의 블루 아워 (사진 남준식) / 뉴스펭귄

마을에 도착하고나서 우리는 사우나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쇳덩이에 소나무 가지를 통째로 담가놓은 양동이물을 끼얹으면 솔향 그득한 수증기가 온몸을 감싸안았다.

"으아~" 정확한 발음은 다르지만 뜻은 통역이 필요없는 감동의 신음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온다. 내 입에서는 된소리가 함께 튀어나왔다. 그것은 추위에 꼬인 창자와 그동안 뭉친 근육이 서서히 깨어난다는 일종의 신호탄이었다.

처음에는 그들의 복슬복슬한 금발 가슴털과 배렛나루에 자꾸만 눈길이 가는 것이 계면쩍었다. 하지만 나 역시 그들의 호기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으니, 결국은 '쌤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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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하는대로 수건만 훅훅 둘러서 발코니로 나가 찬공기를 쐬고, 다시 후끈후끈한 사우나 안으로 들어와 훌러덩 벗기를 능청스럽게 따라했다. 나름 한국의 목욕탕에서 갈고 닦은 실력을 십분 발휘했더니, 나더러 루스끼(러시아 사람) 다 됐다고 한다.     

목욕을 마치고 그토록 갈망하던 코카콜라의 뚜껑을 신성스럽게(?) 열었다. 게걸스럽게 마시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너무 흥분하지 않기로 내 안의 나와 약속을 했던 터다. 그러나 또 다른 나의 자아는 콜라를 배탈 날 때까지 마셨댔고 결국 나는 여느 곳보다 화장실 구조를 가장 섬세하게 묘사할 수 있게 됐다. 

캄차츠키로 돌아와 우린 헤어졌다. 여행을 거듭할수록 헤어짐은 또 다른 만남의 시작이란 걸 알기에 이젠 이별이 마냥 아쉽지만도 않았다. 

대체로 맛이 오묘하기 짝이 없지만, 한계효용에 따라 대장금이 차려준 밥상처럼 느껴졌다 (왼쪽부터) 불고기, 김치찌개, 된장찌개, 김치볶음밥 (사진 남준식) / 뉴스펭귄

나는 캄차츠키의 한 조용한 숙소에서 일주일 정도 요양 생활을 했다. 일단은 저린 발의 회복이 늦었고, 등골에 달라붙은 뱃가죽을 떼어내야 했기 때문이다.

살은 그새 5kg이 빠져 앞자리가 7로 시작했던 몸무게는 6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래서 곰들이 지방을 태워 열을 내려고 살을 찌우는 것이었구먼. 2년 동안 꾸준히 운동해서 가꾼 몸이 고작 2주 만에 망가졌을 때의 허탈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한식당에서 먹는 김치찌개는 그 무엇을 무마시키고도 남을 행복감이었으니, 이브가 따먹은 사과도 장발장이 훔쳐 먹은 바게뜨도 내가 먹은 김치찌개를 당해낼 순 없으리라.  

내가 캄차카를 떠나기로 결심하게 된 때는 지인의 추천으로 <잉여들의 히치하이킹>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고 난 뒤였다. 누군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저토록 아름다운 도전을 이어나가고 있을 텐데, 나란 녀석은 한가하게 누워서 게으름이나 피우고 있을 때란 말인가? 일단은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구경하며 타성에 젖은 감각들을 되찾기로 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탈 여유는 없었다. 그리고 난 원래 기차보다 비행기를 좋아한다. 내게 비행기란, 설렘이란 감정의 총체적 집합과도 같다. 10시간의 비행 중에 같이 탄 아기가 정확히 9시간을 울어대는 통에 나의 가여운 달팽이관이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듯했다. 부아가 치밀어 올랐지만 애써 웃으며 "그 아이의 목청으로 미루어 보건대 커서 가수를 시키면 크게 될 것"이라고 아이의 부모에게 귀띔해 주고는 모스크바 공항에 내렸다. 

10시간을 비행해도 같은 나라 안이라니! (사진 남준식) / 뉴스펭귄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무는 동안, 잔 다르크가 살아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하는 '리자 팔(Liza Pahl)'이라는 여성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나의 다음 목적지는 카프카스 산맥의 최고봉, 엘브루스(Elbrus, 5642m)로 정했기 때문이다.

프로메테우스가 바위산에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혔다는 곳이 바로 카프카스(Kavkaz), 영어식으로는 코카서스(Caucasus)이다. 러시아 남서쪽, 조지아와 국경을 맞대고 흑해(Black Sea)와 카스피해(Caspican Sea) 사이에 횡으로 뻗어있는 이 산맥에는 많은 민족이 모여산다. 러시아가 왜 여러 민족으로 이루어진 연방국가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지역이다.

내가 리자를 선택한 이유는 단순했다. 엘브루스 등반업계를 주름잡고 있는 E사와 P사보다 아무래도 덜 알려져 있고, 소수 인원을 취급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직접 지었다는 산장이 아늑하고 포근해 보이는 것이 마음에 쏙 들었다. 

오후 6시, 카프카스의 관문도시 격인 미네랄니예보디(Mineralnye Vody) 공항에서 마침내 캐나다·독일 국적의 일행과 합류했다. 그리고 서너 시간을 밟아 엘브루스 기슭의 아자우(Azau)로 들어갔다. 아사 일보 직전이었으나 다행히도 호텔에서 리자가 늦은 만찬을 차려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이지 눈물겹게 반가웠다.

이런 곳에 묶여 있었다면 썩 나쁘지도 않았을건만... (사진 남준식) / 뉴스펭귄
전지적 나의 침대 시점에서 보이는 엘브루스 쌍봉. 여기에 맥주 한 잔 곁들이고 있노라면... 나쁘지 않은 인생이다 (사진 남준식) / 뉴스펭귄

흔히들 엘브루스를 유럽 최고봉이라 하여 세븐 서미츠(Seven Summits, 7대륙 최고봉)의 반열에 올려놓지만, 지리적 구분을 어디에 두는가에 따라서 말이 달라진다.

사실 내 기준으로는 프랑스의 몽블랑(Mont blanc, 4810m)이 가장 합리적인 유럽 최고봉이 아닐까 생각하는데 말이다. 카프카스 산맥은 알프스 산맥보다 고도는 높지만 덜 험준하며, 이러한 일말의 생각 때문인지 엘브루스를 오른다는 행위 자체에 대한 큰 기대와 각오, 의미부여 따위는 없었다. 더욱이 얼마 전에 캄차카의 비범한 활화산을 경험했기 때문에 엘브루스는 그 뒤풀이 쯤으로 여겨진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엘브루스에는 스키장이 대규모로 개발되어 있는 까닭에 숙박, 곤돌라, 리프트, 설상차 등 각종 인프라가 필요 이상으로 구축되어 있다. 상대적으로 캄차카에 비해 위험성 부담이 없다는 점이 내게는 싱겁게 보였달까? 여러 기계의 동력을 빌린다는 대목이 나로 하여금 이 등반의 유효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끔 했다.

난 그동안 높이를 추구하는 것이 등반의 본질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등반의 내용이며, 마찬가지로 매사에 있어서 결과보다 과정을 추구하겠다는 가치관의 변화를 이역만리 엘브루스까지 와서야 도모할 수 있었다. 

적막강산은 고사하고 시끌벅적한 해발 5000m. 10개국어 듣기평가를 한 번에 할 수 있다 (사진 남준식) / 뉴스평가
그냥 동네 형인줄 알았는데 골드만삭스에 다닌다는 말을 듣고 바로 연락처를 받았다. 인생사 어떻게 풀릴지 모르니까 (사진 남준식) / 뉴스펭귄

8월 15일 오전 6시, West summit(5,642m)에 올라섰다. 미네랄니예보디서부터 내내 함께한 네이쓴과 피터가 이대론 아쉽다며 내친 김에 East summit(5,621m)까지 가자고 한다. 그러나 이미 나는 길고 긴 여정으로 체력이 방전된 상태였다. 또한 나를 죄여오는 구속으로부터 진작에 나를 풀어준 상태이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East summit을 남겨두고 내려오는 발걸음은 클류쳅스카야 때와 같이 결코 무겁지가 않았다. 흥얼거리는 콧노래가 귓바퀴를 맴돌다 허공으로 날아가버렸다.  

산장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피로한 눈이 감겼다. 보기 위해 눈을 감는다고 했던 어느 화가의 말처럼, 러시아에서 보낸 지난날들이 포만감 가득 나의 내면을 채워주고 있었다.

뭐하고 다니길래 피부가 까맣냐고 많이들 물어보시는데, 이러고 다녀서..? (사진 남준식) / 뉴스펭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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