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석원의 시비] 출산은 축복인가

  • 채석원 기자
  • 2019.02.05 00:00
한국이란 나라에서 출산이 과연 축복일 수만 있을까 (사진 Pixabay)/뉴스펭귄

영화 ‘세븐’에서 트레이시 밀스(기네스 펠트로)의 영혼은 불안에 잠식돼 있다. 아이를 가졌지만 키울 자신이 없기 때문. 그는 남편 동료인 윌리엄 소머셋(모건 프리먼)에게 아직 남편에게조차 임신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털어놓으며 불안감을 호소한다. 소머셋은 공감하며 대꾸한다. 자신과 애인 역시 한때 아이를 가진 적이 있지만 낳지 않았다고. “이런 세상에서 도저히 아이를 키울 자신이 없었거든요. 옳은 결정이었죠.”

영화는 어렵사리 출산을 결심한 트레이시의 비극적 죽음을 통해 세속도시의 한 줌 기대를 처참히 으깬다. 시종 음침하고 음습한 미장센으로 고립의 길을 걷는 현대인의 운명을 훑는다.

영화 속 사건의 종결지가 광활한 황무지란 점은 의미심장하다. 도시 바깥에서도 현대인의 운명이 다르지 않다는 점을 암시하는 것으로 읽히는 때문이다. 감독(데이빗 핀처)의 도저한 비관주의에 공감하는 이가 많아진 때문일까. 흥행에서 처참하게 실패한 ‘세븐’은 개봉한 지 24년이 지났지만 범죄스릴러물의 바이블로 군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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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을 권리를 빼앗긴 이들의 공포감과 고단함을 극단적으로 그린 ‘세븐’은 초현실적 극단성으로 기묘한 현실성을 획득해 시간을 뛰어넘는 고전으로 자리를 잡았다. 현대인들의 공포심리를 건드리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런데 똑같은 ‘아이 낳지 않은 사회’ 현상을 놓고 각 나라는 ‘세븐’과 전혀 다른 양태의 공포감을 주입한다. 현재 상당수 나라는 저출산이나 인구절벽에서 국가붕괴 징후를 읽는다. 아이를 낳지 않으면 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공포를 확산하며 ‘출산’을 부르짖고 있다. 한국 정부도 다르지 않다.

하지만 영 글렀다. 현재 구성원마저 잉여로 전락시키는 이 사회가 미래의 구성원을 살갑게 대접하리라는 장담을 누가 할 수 있을 것인가. ‘아들딸 구별 말고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더니 이젠 하나만 낳으면 외롭고 이기적으로 클 가능성이 높다고 국민을 위협하는 이 아이러니.

수신자인 일반 국민의 감정이나 타산을 생략한 이 같은 일방적인 타전은 대체로 구성원의 수신 거부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상당수 수신자가 정치적 자각 따위 없이도 자기 위치를 저절로 깨달을 수 있을 정도로 세상은 대부분 불가능성의 영역으로 구성돼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수신자들의 반응은 ‘지금 목구멍도 포도청인데 나라가 지랄을 하고 있구나’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문제는 수신자가 자기 위치를 충분히 자각하고 있음에도 발신자(정확히 말하면 발신의 논리를 만드는 이들)에 대한 동일시 욕망에 사로잡힐 때다. 이 경우엔 내적 깨달음이 자신에 대한 연구, 혹은 타인에 대한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연민이나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연대 대신 발신자 지향으로 나타난다. 적에게 스스로 포섭되는 길을 택하는 것이다. 한국인 상당수가 스스로를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가난한 이들이 아이 생산의 책임까지 떠맡아야 할 이유가 도대체 뭐단 말인가.

더 큰 문제는 없는 자들의 무모한 지향이 대부분 실패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는 데 있다. 영원히 타자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음에도 타자 처지에 자기를 대입하려는 자연스러운 감정 대신, 타자를 자기 영역으로부터 끊임없이 쫓으려는 악다구니에 여념이 없는 사람이 많다. 신기루를 좇다 적화(敵化)에 실패하면 자기혐오가 남는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있지만 결국 용은 용만이 낳을 수 있고, 그나마 적당한 출산 공간이 마련돼야 세상에 용이 고개를 내밀 수 있다. 그럼에도 상당수 구성원은 수많은 실패를 기꺼이 감내하고서야 이 사실을 마지못해 시인한다.

이 시대 구성원 상당수가 타자임에도 적화의 욕망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판을 깐 이들은 누구인가. 누가 99%로 하여금 1%의 신기루를 좇게 하는가. 왜 없는 사람들이 1%의 사상을 앞장서 전파하는가. 누가 ‘출산주도성장’이란 기묘한 정책으로 청년의 출산과 육아를 사랑의 결실이 아닌 국가 성장의 도구로 취급하는가.

지금 세계는 저출산 사태가 환경에 최적화한 적응의 몸부림이라는 것을 애써 외면하고 있다. 아데어 터너 영국 금융감독청장은 저출산에 대한 공포가 과장됐다고 지적한다. 그는 사람이 더 오래 더 건강하게 사는 건 마다할 일이 아니고, 은퇴 연령을 높이는 방식으로 문제를 풀면 된다고 한다. 또 로봇에 의한 자동화가 급진적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큰 상황에서, 노동 가능 인구가 급증하는 것도 그렇게 유익한 일은 아니라고 말한다. 결정적으로 여성의 역할에 대해 현대적인 태도를 갖고 있는 선진국에선 인구대체율보다 낮은 출산율은 불가피한 동시에 환영할 만한 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고 강조한다.

이제 저출산에 대한 관점을 바꿀 때도 됐다. 국회의원들이 최저임금제를 공산주의와 스스럼없이 등가에 놓는 나라, 화력발전소에서 사고로 목숨을 잃은 노동자의 시신이 49재를 넘겨서까지 냉동고에 있는 나라, 원자력발전소 밀집도가 세계 1위이고 원자력발전소 30㎞ 반경 내 인구수가 세계 1위인 나라, 아이들에게 마스크를 씌우지 않으면 바깥에 내보내기 불안한 미세먼지의 나라. 이런 나라에서 출산이 마냥 축복일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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