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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fact) 대홍수의 시대’다. 사방에서 팩트가 넘쳐난다. 미디어에도 SNS에도, 카페에도, 단톡방에도 팩트로 도배돼 있다. 팩트의 홍수에는 진짜 팩트와 가짜 팩트가 한데 뒤엉켜 있다. 진짜와 가짜의 분간이 불가능하다. 이전에 대한민국의 어떤 정당에서 시범을 보였던 것처럼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감별법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그런 신묘한 방법이 있을리 없다. 더욱이 하나같이 진짜라며 ‘순정(純正)’의 이름표를 붙이고 있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진위를 가려내기란 한강 백사장에서 바늘 찾기 보다 더 어렵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팩트의 진위여부를 확인해 준다는 자칭 감별자들 또한 우후죽순처럼 생겨난다. 한 종합편성방송의 뉴스프로그램에서 ‘팩트체크’라는 코너가 크게 인기를 끈 이후 미디어마다 유사 프로그램 만들기가 대유행이다. 팩트체크는 이제 프로그램의 고유명사에서 완전히 일반명사로 옷을 갈아 입었다. 이른바 주류 언론매체도, 공영방송도, 유튜브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1인방송도 모두가 팩트를 체크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팩트는 하나의 확정된 사실로서 분명하게 존재할 텐데 그것을 여럿이 나서서 다시 검증하고 확인한다며 부산을 떤다. 팩트체크가 체크했다는 팩트는 과연 팩트인가. 34년여전 기자생활을 처음 시작했을 때 선배기자들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말이 생각난다. “팩트 확인했어?”팩트와 팩트체크가 넘쳐나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것을’ 믿지 못하기(않기) 때문이다. 팩트라고 이름 붙어 있는 것들에는 진짜 못지 않게 가짜가 많고(아마도 가짜가 더 많을 공산이 크다. 팩트체크 요망), 팩트체크도 어느 시각에 따른 검증인지에 따라 결과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만큼 팩트를 부정하는 팩트, 팩트체크를 뒤집으려는 팩트확인이 끊임 없이 양산된다. 이는 대한민국의 이념적 진영들에 만연한 확증편향 현상의 불량한 결과물이다. 확증편향은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는 정보는 받아들이고 일치하지 않는 정보는 무시하는 경향을 일컫는다. 논리학에서는 cherry picking이라고도 하는데, 접시에 담긴 신 포도와 체리 가운데 체리만 골라서 쏙쏙 빼먹는 것을 빗댄 말이다. 2020년 대한민국에서는 부동의 객관적 사실이라도 진영논리에 반하는 것이라면(혹은 불리한 것이라면) 곧장 부정된다. 어느 진영 가릴 것 없이 하나같이, 가짜 팩트를 만들어 진짜를 뒤덮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진다. 팩트체크 역시 진영논리에 부합하는 팩트들을 끌어모아 이슈화 된 팩트를 부정하거나 강화하는 방향으로 쓰인다. 2017년 이후 대한민국 사회의 메가 트렌드다. 누가 뭐라 해도 이는 팩트다. 문제는 우리가 이처럼 진짜 팩트를 찾지 못하고(않고) 오리무중을 헤매다가는 세계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우리의 눈이 영영 사시(斜視)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통계학 분야의 세계적 석학이자 의사였던 고(故) 한스 로슬링(Hans Rosling) 박사는 사람들이 세상에 대해 오해하는 이유는 ‘지식’이 ‘적극적’으로 잘못 됐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세상에 대한 사람들의 오해가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지 확인하기 위해 오랫동안 ‘세계에 관한 지식테스트’를 진행했다. 13개의 질문으로 구성된 테스트는 세계에 관한 통계 상식(?)들인데, 예를 들면 ‘오늘날 세계의 기대수명은 몇 세일까’라는 질문과 함께 3개의 보기(A.50세 B.60세 C.70세)가 제시되는 방식이다.(정답을 맞혀보시라.) 질문의 난이도는 상식 수준. 그러나 정답을 맞힌 비율은 ‘상식 밖’이다. 2017년에 14개국 약 1만2000명에게 질문을 던진 결과 맨 마지막 13번 문제(기후변화 관련)를 뺀 열두 문제 중 정답을 맞힌 문제는 평균 2개에 불과했다고 한다. 만점자는 단 한 명도 없었고, 무려 15%는 단 한 문제도 맞히지 못했다. 한스 박사는 다들 교육수준이 높고 세상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테스트 결과라는 점에서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고 했다. 일부는 일반 대중보다도 낮은 점수를 받았는데, 이 중에는 노벨상 수상자와 의료계 연구원들이 끼어 있다는 점에서 ‘몹시 참담했다’고 토로했다. 한스 박사는 저서 ‘팩트풀니스(Factfulness)’에 이런 테스트 결과를 공개하면서 “잘못된 지식이 머릿속에 들어찬 탓에 모두가 세계를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 심지어 침팬지에게 물어봤을 때 나올 법한 결과보다 더 나빴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질문한 모든 집단은 세상을 실제보다 더 무섭고 더 폭력적이며 더 가망 없는 곳으로, 한 마디로 더 ‘극적인 곳’으로 여겼다고 말했다. 실제로는 세상이 그렇게까지 ‘극적으로’ 나쁘지 않고 살 만한 곳이라는 게 한스 박사의 주장. 하지만 세상에 대해 오해하지 않으려면 먼저 우리의 사고를 잘못된 방향으로 끌고 가는 팩트의 홍수에서 빠져 나와야 하는데, 현재로서는 탈출할 확률이 지극히 낮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옳고 그름이 아니라, 객관적 사실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내편이냐 아니냐로 팩트가 총동원되고 생산되고 갈라지는데 무슨 수로 오해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이대로라면 대한민국은 갈수록 더 무섭고 더 폭력적이며 더 가망 없는 곳이 될 것이다. ‘실제’로는 어떤지 아무도 모른 채, 아니 ‘오해하는 현실’이 당장의 엄연한 실제인데 무슨 용빼는 재주가 있을 수 있을까. 대한민국 사람 모두는 지금 GPS가 고장 난 내비게이션의 안내에 따라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채 질주하고 있을 뿐이다. 환경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그나마 희망적인 것은 사람들이 기후변화의 심각성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팩트에 충실하게 잘 알고 있다는 점이다. 앞서 인용한 한스 박사의 ‘세계에 관한 지식테스트’ 제13번 문제는 기후변화 관련인데, 정답을 맞힌 사람이 86%에 달했다. 열 명 가운데 거의 아홉 명이 정답을 골라낸 것. 문제: 세계 기후 전문가들은 앞으로 100년 동안의 평균기온 변화를 어떻게 예상할까? A.더 더워질 거라고 B.그대로 일 거라고 C.더 추워질 거라고. 정답은 A다. 아무리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트위터를 통해 가짜 팩트를 날려도 기후변화 문제 만큼은 ‘팩트풀니스(factfulness)’다. 이 단어는 한스 박사가 같은 이름의 저서에서 처음 소개한 말로, '사실에 근거해 세계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관점'을 뜻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에서는 기후변화 문제와 관련해서도 가짜와 진짜 팩트가 뒤엉켜 객관적 사실에 근거한 판단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수도 없는 팩트체크 역시 각자의 진영논리에 부역하기 바쁘다. 대표적으로 원전 문제가 그렇고, 미세먼지 또한 그렇다. “팩트를 말하자면...” 이라는 소리 자체가 가짜 팩트를 전제하는 것처럼 비쳐질 뿐이다. 누구든 틀릴 때가 있다는 말은 전적으로 팩트다. 하지만 계속 ‘상식 밖으로’ 틀리는 것은 어쩌다 한 실수가 아니라 고의다. 우리는 슬프게도, 후자가 여론을 쥐락펴락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팩트다.사족 하나. 나는 앞의 ‘테스트’에서 이 문제 또한 맞히지 못했다. 한번 도전해 보시라. 문제: 1996년 호랑이, 대왕판다, 검은코뿔소가 모두 멸종위기종에 등록됐다. 이 셋 중 몇 종이 오늘날 더 위급한 단계의 멸종위기종이 되었을까? A.2종 B.1종 C.없다

환경뉴스 | 김기정/발행인 | 2020-01-28 11:07